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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Mar 01. 2023

명절만감 (名節萬感)

묵상지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13년 2월호 기고문

결혼 후 첫 명절을 맞아, 잘 손질해 입은 한복처럼 빳빳하게 긴장한 채 시댁에 갔다. 어른들께 ‘새아가’의 첫 명절 인사를 드리는 것으로 시작된 하루는 예닐곱가지의 전을 지지고, 송편과 만두를 빚고, 사이사이 끼니를 챙기고, 저녁엔 어른들 술자리 곁에 앉아 하시는 말씀을 듣고, 순식간에 쌓이는 그릇들을 틈틈이 닦으며 늦은 밤에야 끝이 났다. 이튿날 아침, 어머님이 부엌에서 움직이시는 소리에 직각으로 퉁기듯 일어난 시간은 새벽 다섯 시 반. 아버님은 벌써 아침 운동 삼아 산에 가셨다. 어머니 주변을 서성거리며 차례 준비를 돕는 사이 지방에 사시는 작은아버님을 비롯한 가족들이 속속 도착하셨다. 차례 시작 일곱 시 반. 끝내고 먹고 치우고 정리하니 어느덧 점심이었다.


친정과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시댁에서의 첫 명절은 내게 얼얼한 문화 충격이었다. 친정엔 차례가 없으니 그 많은 차례 음식 마련을 도와 본 일도 없었고, 여자 남자 사이의 위치나 역할 구분도 덜했으며, 동트기 전부터 움직이는 일도 거의 없었다. 거기에 사흘 내내 이어진 어른들의 ‘새 식구’에 대한 사랑과 정신 교육(?)은 대단한 압박으로 다가와, 하다 못해 '친정'에 '보내 주신다’는 표현에도 가슴이 턱 막혔다. 어머님이 챙겨주신 선물을 들고 이름도 낯선 ‘친정’으로 향하는 마음은 그래서 심란했다. 시댁과 친정 사이에 끼여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붕 뜬 기분이었다.


그러다 엄마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문 앞에 서 그만 엄마아아아 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옆에 선 장군은 난감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가족들은 그가 민망할 새라 “장군 고생 많다. 쟤가 저렇게 울보에 바보란다. 알지?” 하며 눙을 치셨다. 그러나 꽁꽁 묶였다 풀린 듯 긴장을 놓은 몸에 덮친 극심한 두통에 몸살로, 나는 그 날 저녁 엄마의 집밥을 한 숟갈도 뜨지 못하고 앓다 응급실 신세를 졌다.


7년 전 그 해프닝을 시작으로 크고 작은 성장통을 거쳐, 시댁과 친정 사이에 끼었던 병아리 신혼부부는 이 쪽 저 쪽을 적당히 오가는 중닭이 되었다. 양가의 문화를 공유한 중닭들은 사뭇  ‘크로스컬처럴’한 명절을 시도하기도 한다. 시댁에선 서둘러 음식을 끝내고 가족이 함께 근처에 바람을 쐬러 가거나 영화를 보러 가시자고 바람을 넣었다. 친정에선 사촌 동생들을 꼬드겨 그네들이 좋아하는 동그랑땡을 만들자며 장을 보고 판을 벌여, 함께 하는 명절 노동의 신성함(!)을 낄낄대며 주장하기도 했다.


날이 갈수록 삶의 지형이 복잡해지는 데는, 가족 안에서 교차하는 일인다역의 역할이 큰 몫을 한다. 때론 몹시 버거운 그 경험 덕분에, 더 많은 입장을 이해할 마음의 울타리가 넓어지기도 한다. 하여, 매형이자 처남이고 시누이자 올케인 일인다역의 기혼자 처지(?)에, 우리는 언감생심 ‘명절이 연휴’일 수도 있다는 기대는 접은 지 오래다. 대신 우리 둘이 팀이라 생각하고, 나도 너도 우리 자신은 사나흘 잊고 오롯이 가족들을 먼저 생각하며 좀 더 적극적으로 ‘명절 퀘스트’에 임하기로 했다.


생각보다, 가족들에게 사랑을 표현할 기회는 그렇게 많지 않다. 생각보다 인생은 짧아, 해마다 돌아오는 명절도 숫자로 헤아리면 그렇게 많지 않다. 지난 명절 손자손녀들이 음식하는 모습을 보며 “명절 분위기 난다”고 좋아하시던 할머니, 양가의 할머님들을 생각하면 매 번의 명절이 아깝고 특별하다.


명절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가장 가까운 이웃인 우리 가족들에게 실천할 좋은 기회다. 새 해 새 마음으로, 우리가 먼저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그리스도의 평안과 위로를 끼치는 설날이 되기를 기도한다. 모두 새해 복 많이 지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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