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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Mar 01. 2023

옛 기억, 새로운 이야기

묵상지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13년 1월호 기고문

열두 해 전이었다. 처음으로 아빠와 단 둘이 코트를 사러 갔다. 단추 재질과 구멍 마감, 후드 위치와 모양, 소재 등 하나라도 마음에 안 들면 도리질을 친 나는 결국 아빠로 하여금 ‘나 다시는 너랑 옷 사러 안 온다’는 선언을 하시게 했다. 그러나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면서도 원체 ‘내 딸’을 제대로 파악하고 계셨던 아빠는 결국 정확히 내 마음에 코트를 찾아내셨다. 완벽한 더플 코트였다.


이윽고 여느 중고딩조차 더플 코트를 입지 않는 시절이 왔건만 나는 한 해도 빠짐 없이 그 코트를 입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와 동생이 각각 결혼을 하고, 사랑하는 빈첸시오 아저씨가 우리의 새 아버지가 되시고, 조카가 태어나고, 강산도 변한 십 년 후 소매 끝이 헤지고 군데군데 더 이상 빠지지 않는 때가 얼룩덜룩한 코트를 나는 라이너스의 담요처럼 겨울마다 끌어안았다.


얼마 전 있었던 대대적인 옷장 정리해고 속에서도 코트는 살아남았다. 엄두를 못 내고 벽장에 쌓아두었던 옷들 중 심사숙고해 고른 몇 벌만 남기고 모조리 재활용 상점에 보내는 거사를 치른 후, 가든한 기분으로 옷장을 열어 제낀 나는 실소를 참지 못했다. 아주 오래 전과 별로 다르지 않은 풍경 때문이었다. 그 낡은 더플코트처럼 누군가와의 기억이 스민 옷들, 어떤 시절의 체취가 담긴 옷들은 연식과 상관없이 자리 한 켠을 차지했다.


그 시기 함께 정리한 책장도 마찬가지였다. 꼭 소장하고 싶은 책만 남기리라 생각하고 훑어낸 자리엔 애초의 예상과 달리 다시 들춰 보게 될 것 같지 않은 쓸모없는(?) 책들이 꽤 많이 남았다. 연애 시절 스무 살의 치기 어린 고민을 번갈아 적은 책이나 누군가 우리에게 빼곡하게 마음을 적어 선물한 책들이 그랬다. 들춰보다 키득거린 유치한 동화와 옛 글씨가 남은 노트와 문제집도 끝내 버리지 못했다.


그런 오랜 물건들이 불러일으키는 새로운 감흥을 간직하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집엔 그런 물건들이 많다. 내가 아주 꼬마일 때부터 썼던, 어미닭과 병아리들이 새겨진 도자기 접시가 여전히 길이 잘 든 채 두돌배기 조카의 간식 접시로 쓰이는 모습은 긴 여행에서 돌아온 내게 묘한 위로를 끼쳤다. 최근 이사한 우리 집에 어울릴 거라며 엄마가 주신 작은 대나무 소쿠리 역시 나보다 나이 많은 물건이다. 엄마는 갓 태어난 내가 그 안에 쏙 들어갈 만큼 작았다며, 상한 데 없이 멀쩡한 그 소쿠리를 한 켠에 두고 가셨다. 엄마의 손때가 탄 오랜 물건들에선 따뜻한 엄마 냄새가 난다. 물건에도 세월에 따라 이야기가 스민다. 그런 물건들은 허투루 대하지 않게 된다. 


결혼 7년차, 장군과 나의 <우리집>에도 서서히 세월이 쌓여 간다. 누군가의 말처럼 끊임없이 소비하는 것이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운명이라면, 기왕 득한 물건을 대하는 태도 역시 내 삶의 많은 부분을 이야기하리라. 그러니 적당히 쓰다가 용도 폐기할 물건을 필요한대로 사들이는 것보단 오래 쓸 단단하고 좋은 물건을 적게 들이자는 데에 우리 둘은 생각이 잘 맞았다.


새해 맞이 정리 차 다시 한 번 집 안을 매만졌다. 한 해만큼 더 낡고 손때 탄 물건들이 섞인 이 공간에서만큼은, 실용과 편리로 꼭꼭 들어찬 세상에 사는 우리들의 몸과 마음이 한껏 이완되었으면 좋겠다. 그 부드러워진 마음결에, 새 해의 새로운 생각과 이야기가 스며들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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