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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Mar 01. 2023

아나바다, 가볍고 풍성한 삶을 꿈꾸며

묵상지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13년 8월호 기고문

금방 차의 트렁크와 뒷좌석이 꽉 찼다. 카시트, 전동 요람 등 부피 있는 아기 살림부터 유축기, 임부복, 육아책 등 엄마를 위한 물건들까지 한가득이다. 임신 초 이미 한 차례 택배를 보내주었으면서도, 복직 전 놀러 오라는 말 끝에 ‘트렁크 다 비우고 오라’던 선배는 육개월 갓난쟁이 돌보기만으로도 벅찼을 그 사이 꼼꼼하게 물건을 챙겨 싸 두었다. 물려 주려고 포장 박스까지 보관해 고이 담은 물건도 다수였다. 


값나가는 물건들은 깨끗이 쓰고 돌려주겠다는 말에 그녀가 엄마 아기 물건은 그렇게 물려 받고 물려 주는 것이라고, 마음 편히 잘 쓰고 다음 사람에게 보내라며 손사래를 쳤다. 감사하고 신기했다. 안 그래도 가급적 가까운 이들의 손때 묻은 아기 물건을 받을 수 있었으면 하고 기도하던 터였다. 첫 아이니 모두를 새 것으로 장만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론 결혼이나 출산처럼 의미 있는 사건들이 지나치게 ‘쇼핑’으로 수렴되는 분위기가 마뜩찮았고, 한편으론 경제적 상황과 별개로 늘 ‘받은 것 많고 줄 것도 많은’ 삶의 방식이 시작부터 아이에게 스몄으면 했다. 


내게 쇼핑이 물건과 돈을 바꿔 양쪽의 소유를 ‘쌓는’ 데 그친 닫힌 거래라면, 값없이 물건을 나누는 일은 삶이 ‘흘러감’이 보다 피부로 느껴지는 열린 공부였다. 필요한 물건을 주변에서 나눠 받은 후엔 나도 그 다음 타인의 필요를 살피게 되곤 했다. 이전 교회의 매 해 바자회에 아깝고 좋은 물건보단 ‘정말 필요 없는 물건’을 추려 내놓은 신혼의 우리와 달리 ‘나보다 남에게 더 필요한’ 물건이라 판단되면 아낌없이 내놓던 선배들의 태도로부터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여행도 그러한 태도에 조금 더 힘을 보탰다. 


 “비워야지. 비워야 새로운 것이 채워지지. 그러니 아까워 말고 버려라 응?” 


낡은 슬리퍼를 버리지 못해 배낭에 꽂고 다니는 내게 한 선교사님이 하신 말씀이었다. 그러게, 고작 배낭 하나에 살림을 모두 짊어진 처지에 무언가를 받으면 그만큼 비워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치를 잊고 있었다. 아까워서, 언젠가 필요할 것 같아서, 갖가지 이유로 이고지고 다니던 물건들을 비로소 기회 닿을 때마다 놓았다. 맨발의 여인에게 신발을, 노숙자에게 침낭을, 때로는 주머니 속 여비를. 그러자 부족함 없이 우리의 필요를 (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변함없이) 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더욱 민감해졌다. 


 돌아와 우리는 전보다 조금 더 자주 비운다. 책장과 옷장과 찬장을 (냉장고를!) 덜어내며 우리로 하여금 어제보다 덜 쥐게 하시기를, 하여 더 자유로이 다스려 주시기를 기도한다. 내년 이맘때엔, 아이를 안고 올 해 고맙게 쓴 물건들을 정리하며 이것들이 누구에게서 왔고 어디로 보내지는지 이야기해 주려 한다. 우리를 위해, 우리를 통해, 때마다 채우고 비우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돌보심을 늘 함께 배우는 삶이면 좋겠다. 


가만히 있어도 물건은 쌓인다. 비움과 나눔과 흐름엔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하는 고릿적 구호는 절약을 위한 지지리 궁상이 아니라, 가든한 채 풍성하게 사는 좋은 방법이다. 한 번쯤 옷장이나 책장을 헐렁히 해 보면 어떨까? 간헐적 단식이나 헌혈이 그렇게 건강에 좋다는데, 살을 빼려 숙변제거제도 먹는다는데, 내 영혼이 한결 건강해지는 비움이라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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