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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Mar 01. 2023

e 편한 세상

묵상지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13년 9월호 기고문

곤혹스럽다. 몸 밖으로 비어져 나온 거대한 종양을 단 아기, 전쟁통에 사지가 상해 울부짖는 누군가의 사진을 여과 없이 보이며 '한 번 like를 누를 때마다 얼마가 기부된다'고 주장하는 스팸(?)이 페이스북 담벼락에 오를 때다. 정작 그게 누구로부터 어떻게 오는 돈인지, 언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들어본 일이 없다. 

  

극단적인 사진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SNS에는 매일같이 도움이 필요한 온갖 비극적인 사연과 동참을 호소하는 정치권과 비영리단체의 소식이 넘쳐난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누군가의 이야기를 ‘공유(Share)’하던 중, 갑자기 멈칫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정말로 이 사람들을 돕고 싶은 걸까. 그저 나 대신 누군가는 돕겠지 하며 클릭 한 번으로 손을 털고 싶은 것은 아닐까. 


 페이스북은 편한 세상이다. 뉴스를 보지 않아도 무엇이 세간의 화제인지, 교계에선 누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따라잡기 쉽다. 얼굴 본 지 오래인 누구의 근황과 관심사도 손에 잡힐 듯 가깝다. 거기에 조금만 머리를 쓰면 원하는 대로 나를 ‘보일’ 수도 있다. 열매 맺는 진짜 나무가 아니어도 충분히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트리 같은 모습을 가꿀 수 있는 곳이 페이스북이다. 


그래서 페이스북에서 재미, 기쁨, 감동을 소비하는 나와 분노, 슬픔, 고통을 소비하는 나 사이에 별 차이가 없다는 자각은 몹시 불편하다. like 한 번, share 한 번으로 세상의 아픔에 ‘동참’하고 있는 듯, 나는 ‘의식 있는 사람’인 듯 어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들에게뿐이랴. 정신 없는 삶 속에서 최소한의 ‘참여’를 하는, ‘살아 있는’ 자신을 느낀다. 나를 보니 종종 그렇게 착각한다. 


그러나 바깥 세상은 그렇게 편치 않다. 외롭게 싸워 온 현장의 활동가들은 여전히 사람이 고프고, 어느 단체는 폭풍 같은 공유에도 (실은 이후 공개된 기부자 명단에 열정적이고 절절했던 공유자들이 없는 것을 보고 약간 시험에 들었다.) 긴급한 모금의 절반을 채우지 못했다. 그래서 한 지식인은 바깥 세상에 닿지 못하는 SNS의 여론을 ‘찻잔 속의 태풍’이라 했던 걸까. 아니, SNS는 커녕 내 가슴 속 찻잔만 뿌듯이 채우다 증발하는 감성 소비의 폭풍은 얼마나 잦았을까. 


강도 맞은 사람을 그냥 지나쳤던 레위인과 제사장에 대해 상상한 적이 있다. 나는 그들이 동정을 모르는 냉혈한이 아니라, 다만 바빴으리라 생각했다. 어쩌면 강도 맞은 이를 바삐 지나쳐 도착한 모임에서 그 참혹한 풍경과 안타까운 심정을 나누며 함께 기도했는지도 모른다. 그 풍경을 보는 순간 심장이 튀어 나올 것 같았던(his heart went out to him) 사마리아인만 삶이 불편해졌다. 주머니가 헐거워졌고, 이틀이나 시간을 지체했으니 말이다. 성경이 ‘진짜’라고 평가한 이가 바로 그 불편함을 택한 쪽이라는 사실은 더욱 불편하다. 


오늘도 편치 않은 세상에 몸 붙인 채 ‘e-편한 세상’에 접속한 내게 바울 사도가 묻는다.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 말만 하고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가계부에 ‘페이스북 긴급 구호’ 항목이라도 만들어야 할까보다. 정보는 많아지고, 삶을 들여 동참하지 않을 핑계는 더욱 궁색해진다. 편한 세상이란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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