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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레드릭 Oct 22. 2023

순례길을 닮은 인생

아시시 순례 에세이: ③ 서로를 이어주는 취약성 Vulnerability

아시시는 이탈리아 움브리아주 페루 자도에 위치한 작은 언덕 마을이다. 순례자들은 로마에서 렌트한 버스로 약 3시간을 이동해 아시시의 센터에 위치한 Casa Di Ospitalità Maria Immacolata에 도착했다. 각자 배정받은 방에 자신의 짐을 풀고 바로 첫 공식 모임이 시작되는 미팅홀로 향했다. 넓다란 방 한가득 순례자 명수에 맞춰 둥글게 원을 그리며 의자가 놓여져 있었다. 순례자들이 다 모이자 순례 코디네이터가 돌아가면서 순례자들의 이름,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순례 여정에 참여하게 된 동기를 나누자고 제안했다.


아시시의 전경 (2013년 9월)


위스콘신에서 온 마지는 자기소개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바로 울음을 터트렸다. 순례 준비를 하면서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예외 없이 자기를 소개하는 간단한 내용을 다른 순례자들에게 공유할 수 있도록 2-3 문장의 자기 소개문을 작성해 단체에 전달했던 터라 순례에 참여한 사람들 모두 마지가 자신을 소개하면서 나눈 이야기, 10년 전 첫째 딸이 심장 종양으로 14세라는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마지는 살아있다면 이제 20대 청년이 되었을 그 죽은 딸 이야기를 나누면서 복받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것이다. 마지는 딸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인생이 많이 바뀌었다고 하면서, 그 무엇보다도 자신은 매일매일 실존하는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신비를 경험하게 되었다고 한다.


마지의 자기소개 후 오레곤에서 순례에 합류한 은퇴한 목사 수잔이 자기소개를 이어갔다. 순례자들 가운데에는 마지와 같이 사랑하는 자녀를 잃은 상실의 아픔이 있는 어머니가 한 명 더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수잔이었다. 수잔은 마지와 달리 담담하게 그러나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의과대학을 마치고 의사로 일하던 첫째 딸이 유방암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모두에게 나누기 시작했다. 그 딸이 죽기 전 언제 아시시를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딸이 자기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 여기는 내가 방문한 곳 중에 가장 영적인 곳인 것 같아. 엄마도 언제 한번 꼭 아시시를 와보면 좋겠다.”라고 했다고 한다. 수잔은 딸의 그 말이 마치 유언처럼 계속 마음에 남아 아시시 방문을 벼르고 별렀는데 올해에야 드디어 기회가 되어 아시시 순례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텍사스에서 목회와 상담사역을 하는 제니, 암과 투병하던 중에 부르심을 발견하고 40세가 넘어 신학공부를 시작해 목사가 된 로라, ‘디트리히 본회퍼’에 관한 책을 3년째 쓰며 마지막 퇴고 작업 중인 아나, 뉴욕에서 온 은퇴한 파이프 오르가니스트 수, 아시시만 이번이 7번째 방문이라는 순례 여행을 좋아하는 폴, 30년 이상 함께 했던 남편과의 굴곡진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치유사역의 길을 걷기 시작한 샌디, 워싱턴 D.C.에 있는 사립학교 입학사정관으로 바쁘게 일하고 있는 어린 두 아이들의 아빠 존, 최근에 하던 사업들을 모두 정리하고 영적 성장에 대한 목마름을 갖고 순례에 참여한 제시,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불행했던 유년기를 보내고 지금은 ‘용서'라는 주제로 사람들을 멘토링해 주는 아이린, 2년 전에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한 메릴랜드에서 온 잭, 콜로라도에서 온 은퇴한 심리상담사 앰버 박사 등 인종, 직업, 나이, 순례를 참여하게 된 동기가 다 제각각인 사람들이 모였다.


What happens when people open their hearts? They get better. ― Haruki Murakami


흥미롭게도 나는 나이도 다르고, 하는 일도 다르고, 현재 삶의 스테이지와 고민도 다른 각양각색의 순례자들 안에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 모두는 각자 나름의 순례여정 중이다(We are all on our own pilgrimage)”라는 사실이다. 용기를 내어 낯선 이들에게 먼저 자신의 연약함과 고통을 열어 보여 주었던 마지, 수잔, 샌디, 잭 등으로 인해 왠지 모르게 순례자들 사이에 ‘나도 내 취약하고 연약한 부분을, 내 부족한 점들을 여기서 나누어도 괜찮겠다'라는 어떤 편안함이 감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의 강함이 아닌 우리의 취약함이 서로를 연결되게 한다는 것(Vulnerability is the driving force of connection)은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의 존재임을 상기시켜 주며 좌절감도 주었지만, 한편 동시에 그 절대자로 인해 어떤 깊은 안도감도 안겨주었다. 우리가 우리 삶의 구원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부활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모두의 삶이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참고] 순례를 인도했던 단체의 두 코디네이터를 제외하고 모든 순례자들의 이름은 가명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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