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 3일 별 것 없이 소소했던 여행
코로나의 여파로 해외여행은커녕 여기저기 다니기도 힘든 요즘, 강원도로 여행을 다녀왔다.
4월 30일-5월 2일 | 강원도 정선 | 총 인원 6명
올해 두 번 밖에 없다는 빅 연휴 중 하나를 앞두고 하늘 길이 모두 막혔다. 두둥
사람 없고 한적한 자연 속에서 쉬고 싶을 때, 기가 막히게 안성맞춤인 곳이 있다.
이번 목적지로 말할 것 같으면 수년 전 동생이 더 자유로운 영혼이었을 때 친구들과 찾아낸 곳으로,
여러 해 전 가족끼리 놀러가 놀러가서 편하게 쉬다오기도 했다.
강원도 산골짜기에 꽁꽁 숨어있는, 아는 사람만 꾸준히 찾는 그런 산장(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티비에도 몇번 나왔다고 한다).
약 한 달 전에 방을 예약하고, 지인과 지인의 지인까지 6명 정예 멤버를 모으고 차 2대로 출발!
경기도 출발 -> 강원도 영월 주천면 -> 평창 올림픽시장 -> 카페 아라미스(정선) -> 숙소
이번 연휴에는 제주도와 강원도로 여행 가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더니.. 정말 차가 많았다.
모두들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던 게다. 홍홍
오전 8시 조금 안된 시각에 출발해서 11시쯤 주천 묵집에 도착. 서울에서 출발한 일행들을 드디어 만났다.
사실 이번 여행은 아직은 좀 어색한 사람들과 떠나는 여행. 장소에 대한 설렘보다는 사람들에 대한 기대와 걱정이 교차했다.
오늘 첫 번째 목적지는 주천 묵집.
코이카 영월교육원을 오가며 여러 번 지나다녔던 주천면인데 이제야 여기를 알게 되다니!
아침부터 빈 속이라 너무 배고팠는데 자극적이지 않은 묵밥이 담백하니 내 입맛에는 딱 좋았다.
매콤 새콤한 메밀전병과 흡사 야채튀김 같은 바삭함이 살아있던 해물파전과도 잘 어울렸다. :)
(전병과 부침개는 사진으로 남길 새도 없이 사라짐)
우리가 갈 때 즈음에는 차가 많지 않았는데 밥 먹고 나오니 앞마당이 꽉 차서 차를 댈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 날 여러모로 타이밍이 기가 막히게 좋았다.
주차장이 정리되길 기다리다 바람에 살랑이는 꽃이 눈에 들어왔는데 이제야 어딘가 깊숙한 곳으로 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묵집 근처에 주천강과 주천면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빙허루'라는 정자가 있어 잠깐 올랐다.
아직 4월인데 어쩜 이리 날씨가 덥냐 -_-
한 7~8년 전(대학생 때)에 내 생일(4월 29일)에 셔츠에 후드를 껴입고 중간고사 시험 보러 가던 게 아직도 기억나는데 불과 8년 만에 반팔을 입고 있다. 강원도라고 시원할 줄 알았더니 크게 다르지 않다.
출발하기 전날 코스트코와 홈플러스에서 장을 봤지만 우리의 돼지런한 여행에는 아직 부족했다.
숙소로 가는 길목에 평창 올림픽 시장에 들러 호떡을 먹으며 고기와 야채, 새우 등을 더 산다.
사실 이번 여행에는 요리사가 한 명 합류했다.
장신의 먹성 좋은 L군은 집에서 파인애플과 오이 등을 큼지막하게 썰어서 만든 피클을 만들어오는 것부터 시작해서 봄 달래 향이 좋다며 달래를 사고, 2끼 해 먹는 여행에서 파 한 단을 통으로 샀다. 그리고 매 끼니때마다 나물 무침과 된장찌개를, 틈틈이 간식을 만들어주면서 이번 돼지런한 여행에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주었다.
바로 숙소로 가기 아쉬워 중간에 카페 아라미스라는 곳에 들렀다.
주말이나 휴일에는 사람이 가득 차는 곳이라던데 오늘은 사람보다는 여유가 더 많았고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감미로운, 딱 2020년 4월 30일에 오면 좋을 곳이었다.
그리고 깜짝 생일 축하를 받기에도 참 좋은 곳이었따. 히히
아침 일찍 집에서 출발해서 다들 피곤했을 터, 우리는 각자의 모습대로 여유를 즐겼다.
누구는 십자수를 하고, 누구는 책을 읽고, 또 누구는 저녁에 있을 시험공부를 했다.
커피 충전 후 오늘의 최종 목적지 도착.
long time no see!
뒤뜰에는 소세지만 좋아하는 복스러운 인상의 강아지가 꼬리를 쫄래쫄래 흔들며 우리를 반겼다.
보통은 방마다 화장실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예약한 방 2개는 같은 화장실을 사용해야 했다.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나는) 잘 지내다가 왔다ㅋㅋ
여기는 도시생활에 익숙하거나 화장실에 민감한 사람들에게는 호불호가 확실히 갈리는 곳이다.
그만큼 장단점이 확실한 곳.
점심에 먹은 묵밥은 이미 다 소화된 지 오래, 짐을 푸르고 저녁을 빠르게 준비한다.
사실 먹느라 사진을 많이 찍지는 못했다. 그냥 엄청 잘, 맛있게, 끝까지 먹었다. 가볍게 같이 마시려고 준비한 와인이 꿀떡꿀떡 잘만 넘어갔다. 그렇게 마셔도 취하지 않은 이유는 아마 이 맑은 공기 때문인 듯- 캬~
저녁 무렵에는 구름이 조금 끼는 듯 싶다가 걷히더니 별이 총총 박혀있다.
나는 그 찰나에 별똥별도 봤다. 껄껄껄
기분이 좋아 찬물(지하수라 정말 차갑다)로도 후딱 잘 씻었다. 아주머니가 뜨끈하게 불 때 주신 방에서 꾸울잠-
구미정
우리가 잔 방에는 낮에도 빛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났을 때에는 대략 7시쯤 되었겠거니 했는데 9시가 넘어 있었다ㅋㅋㅋㅋ
마당에 나가니 먼저 일어난 P양이 있었다. 우리는 사실 이번 여행에서 처음 만난 사이다.
예전에 산장 근처에서 돌아다녔던 기억을 더듬어 아침 산책을 시도했다.
약간은 어색하게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서 말하며 어릴 때 이야기, 신앙, 코이카 등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물흐르듯 대화를 나눴따. 그리고 문득 발견했다.
이 친구,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알 수 없는 미래를 걱정하고 고민하면서도 생에 대한 열정과 에너지가 느껴졌다.
(너무 오글거리나.. 하지만 사실인걸ㅋㅋ)
아주 가끔, 내가 더 멋진 사람이 되고 싶도록 자극하는 사람들이 있다.
요즘 그런 대화와 사람이 고팠는데, 여기에서 만나다니! 우하하
기분 좋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하다가 점심을 먹자고 연락을 받고 숙소로 컴백!
어느새 점심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오늘 아점은 온갖 야채 육수에 새우를 넣고 끓인 라면.
인스턴트 맛은 하나도 없이 시원한 국물이 일품이었다. 크~
오늘의 계획은 특별한 일정 없이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
햇볓은 정말 뜨겁지만 그늘은 서늘한 앞마당에서 각자 자리를 잡고 달달구리 쿠키와 아침 일찍 시내에서 공수해온 원두로 내린 커피를 마시며 따로 또 같이 여유를 즐겼다.
그리고 나는 잠깐 햇빛에 있었다고 팔 마디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다시 전쟁 시작이다. 햇빛과의 전쟁 -_-
마당에서 여유를 좀 부리다가 장소를 옮겼다.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산장에 올라가기 전 '구미정'이라는 작은 정자가 있다.
이쪽 방면으로 오가는 발걸음이 많지 않아 조용하고, 구미정에 앉으면 커다란 절벽과 그 아래 계곡물이 휘감아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정자에 돗자리도 깔고 캠핑의자도 설치하고 앉아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맥주 한 캔 마시니 부러울 게 없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와 졸졸졸 흐르는 계곡물, 흘러가는 구름을 보다 보면
멍 때리는 것은 기본이요, 머릿속에 잡념이 다 사라진다.
사실 그게 다인데, 이게 뭐라고 우리는 행복했을까. 가장 좋았던 시간이었는데 기억에만 남았다.
다음에는 시집을 한 권 가져가야지!
오늘 저녁도 역시나 마찬가지로 고기 파티.
온갖 야채와 명이나물, 달래무침, 파절임 등등 고깃집보다 더 푸짐했던 메뉴였다. 앞으로 어떻게 먹어도 이보다 더 잘 먹을 수는 없을 듯. 꿀꿀
이번 여행에서는 보드게임을 종류별로 참 많이 했다.
뱅, 스플렌더, 달무티, 로보 77, 할리갈리까지.. 이틀 동안 보드게임으로 뒤처리 설거지 다 정한 듯 ㅋㅋㅋ
*지인으로부터 5월 1일부터 밤하늘에 유성우가 막 떨어진다는 제보를 받았다. 나이스 타이밍!
그래서 우린 새벽에 약 1시간 거리에 있는 안반데기에 가서 별똥별 파티를 하기로 했다. 꺆꺆꺆
저녁을 먹고 게임을 하다가 놀다가 졸다가 음악을 듣다가 결국 새벽 3시쯤 일어나 출발-
안반데기 -> 숙소 -> 정선 실로암 목욕탕 -> 카페 -> 집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안반데기.
몽골만큼은 아니어도 간만에 각 잡고 별 좀 보려나- 후후후
캄캄한 밤, 꼬부랑 길을 조심조심 달려서 새끼 고라니도 아슬하게 피해 도착했는데..
두둥
차에서 내리자마자 내가 느낀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안개인지 구름인지 모를 것이 자욱하게 깔려있고 사방에 풍력발전기가 엄청난 바람소리를 내며 돌고 있었다.
풍력발전기에서 나오는 빛이 안개 사이로 퍼지고, 희미하게 풍력발전기가 휙휙 돌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 매우 무섭다.
몇 걸음 걷지도 못하고 다시 차로 들어갔다...
이미 별은 글렀고, 결국 차에서 조금 더 기다리다가 전망대에서 일출을 보고 오기로 했다.
그래요, 우리 별은 그냥 몽골에서 보는 걸로 합시다. 허허허
저 멀리서부터 희미한 빛이 나타날 때쯤,
어둠을 헤치고 바람을 가르며 전망대로 향했다.
산꼭대기에서 세차게 싸다구를 날리는 바람 때문에 내가 떨어지던지 저 풍력발전기 날개가 떨어지던지 뭐든 하나는 떨어질 것 같았고, 이게 바람 소리인지 풍력발전기 소리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보고 들리고 느껴지는 엄청난 자연의 서라운드 향연으로 정신이 바짝 들었다.
내가 바란 것이 이런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정신이 바짝 드는 자연, N.A.T.U.R.E. 를 느낄 수 있었다.
(전날 저녁, 우린 하늘에 켜켜이 박혀있는 별과 자연을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더라는 이야기를 했었더랬다ㅋㅋ)
그렇게 해서 우리가 본 것은 이 영롱한 일출이었다.
주위 구름에 햇빛이 오색찬란하게 반사되면서 핑크빛 하늘이 펼쳐졌다.
그래, 별 대신 이것도 좋다.
다만 우리는 좀 춥고 졸렸을 뿐이다. 하하
(앞으로는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수면 사이클은 건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새벽 6시쯤 숙소로 돌아와 부족했던 잠을 보충하고 주인아주머니께서 차려주시는 아침식사를 했다.
맛이 다 다른 나물과 된장찌개, 더덕구이, 장아찌 등이 주요 반찬이었는데 감칠맛이 장난이 아니었다.
건강하고 속 편하고 담백한 한 끼. 후후
그리고 바로 피자도 먹고 짜장면 뺨치는 짜파게티까지 줄줄이 냠냠냠
이쯤 되면 저 아침식사는 약간 애피타이저 느낌이다.
별채로 놀러 오신 다른 가족분들이 나눠주신 수박까지 먹고 짐을 챙겨 산장을 나섰다.
오랜만에 다시 오니 이 산장에 대한 어떤 환상같은 것은 다 사라지고 그냥 자연 속에서 고요하게 쉬기 좋은 곳 이라는 이미지만 남았다. 뭐, 그거면 됐다.
6명이 작은 온수통으로 씻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아 정선 시내 목욕탕에 들러 개운하게 샤워를 하기로 했다.
연휴라 정선 시내에는 차들이 가득가득했고, 아주 오랜만에 가본 목욕탕은 옛날 모습 그대로였다.
지인과 함께 목욕탕을 들어가는 게 조금 쑥스러웠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들어가서 옆에 할머니께 클렌징 폼과 비누까지 빌려서 씻고 나왔다. ㅋㅋㅋㅋㅋ
그리고 근처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까지 마시고 나서야 우리는 서울로 향할 수 있었다.
여름에는 에어컨 없이도 정말 시원하다 하니, 더운 여름에 종종 생각날 것 같다.
좋은 사람들을 만났던, 그리고 정말 잘 먹고 마셨던 여행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