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 끝가지 간다 프로젝트
떠나라!
신의 부름을 받고 가나안 낯선 땅으로 떠난 아브라함, 그리고 그의 후손들.
길 위에서 편안했을까? 설마.. 시련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이 이야기를 드라마로 풀면 정말 찐한 막장급의 극성을 가지고 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 여종 하갈의 갈등 (=내 남자의 여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울부짖음으로 여종 하갈과 그로부터 탄생한 아들 이스마엘을 브엘세바 사막으로 내쫓아버린 아브라함. (=펜트하우스),
아들을 바치라는 신의 음성, 그 음성을 받자와 이삭을 죽음의 제단 위에 올린 아브라함의 믿음
아들 이삭에 대한 엄마 사라의 집착 (=스카이캐슬)
엄마 사라보다 더 이삭에 집착했고 이삭을 조정하려 했던 이삭의 아내 리브가(=굿와이프)
1대 아브라함과 사라 → 2대 이삭과 리브가로 이어지는 시기와 질투와 갈등의 서사는 그 다음 대(3대 에서와 야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른바 에서와 야곱, 여기에 엄마 리브가까지 연루된 형제의 난(=마인)
아버지 이삭과 첫째아들(에서), 어머니 리브가와 둘째아들(야곱)이 편을 먹고 경쟁하는 시간, 그 경쟁의 하이라이트로 엄마와 야곱의 쿵쿵짝으로 첫째 아들 에서가 받아야 할 복을 아버지로부터 탈취한 후 엄마의 고향으로 줄행랑 치는 야곱의 이야기는 가족을 속이고, 스스로를 속이고, 불운한 과거의 열등감과 내적 갈등을 품고 살아가는 도망자의 서사를 품고 있다.
그 도망자의 길 위에서 새로운 비전과 꿈으로 만난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은 도망자 영화의 백미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새로운 비전과 꿈을 만났다하여 삶이 평탄해지는 것은 아니다. 야곱은 가장 사랑했던 늦둥이 막내 아들 요셉을 잃는다. 이유는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요셉이 얄미워죽겠던 형님들, 설상가상 이 쪼그만 놈이 자꾸 자신들의 허물을 아버지한테 일러바치는 거다. 형들은 계략을 짜 요셉을 죽이기로 했고, 작전 디데이 날, 마음이 약해진 르우벤과 유다가 “죽이지는 말고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아넘기자”고 형동생들에게 제안하여 요셉은 이집트의 노예로 팔려간 거다. 사랑하는 요셉의 실종은 야곱에게 큰 상처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집트 노예로 팔려간 요셉의 이야기는 스펙터클한 대하 사극을 닮아 있다. 바로의 경호대장 보디발에게 팔려간 요셉은 매력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매력적인 젊은 청년 요셉이 이야기에 등장한다면, 그 다음에는 반드시 유혹이 따르기 마련이다. 보디발의 아내는 청년 요셉을 유혹하려 하고, 요셉이 거절하자 성추행범으로 요셉을 감옥에 쳐넣어 버린다. 감옥에서도 요셉은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이 그렇듯 도드라진 캐릭터였고, 이런저런 스토리가 쌓이고 쌓이면서 마침내 이집트의 총리가 된다. 총리가 된 후 이야기는 끝? 아니다. 아직 형들과의 극적인 재회 장면이 남아 있다. 형들에 대한 복수극이냐 아니면 화해극이냐 심장을 쫄깃하게 쥐는 장면들이 이어지다 용서와 화해의 스토리로 이어진다.
"그렇게 아버지 요셉과 그의 아들들은 이집트 총리 요셉의 보호하래 행복하게 잘 살았더래요."
나레이션으로 이런 보이스가 깔릴 때즈음 창세기 엔딩 스크롤은 올라가는데, 이건 그 다음 장 출애굽기의 반전을 만들기 위한 떡밥이었다.
출애굽기는 이 문장으로 시작된다.
“이스라엘 사람이 이집트에서 학대를 받다.”
그렇다. 이집트에서 총리의 직계가족으로 자리잡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왜인지 모르게 미움받는 존재가 되었고, 노예로 전락했다. 무려 400년 가까이 지속된 노예 생활이었다. 얼마나 싫어해야 400년 가까이 노예로 묶어둘 수 있는 것일까? 얼마나 무기력해야 400년 가까이 노예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일까?
노예 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이번에도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떠나라!”
출애굽기는 그 떠남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말주변도 없고, 겁도 많은 모세였다. 기원전 1250년 경 하나님은 이집트에 막강한 힘을 과시하며 모세에게 영도를 맡겨 그들을 해방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수 있게끔 개구리 소동, 이 소동, 파리 소동, 집짐승의 죽음, 피부병 전염, 우박, 메뚜기 소동, 어둠의 지배, 처음난 모든 것의 죽음을 기획하고 실행한다. 하이라이트는 쫓아오는 이집트군을 물리치기 위해 홍해의 물을 가르는 장면.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은 시나이 산에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고 의례와 율법을 정한다. 그리고 광야에서 40년을 떠돈다. 광야의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배고픔에 시달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주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다. “광야에 나가서 죽는 것보다 이집트 사람을 섬기는 것이 더 나으니, 우리가 이집트 사람을 섬기게 그대로 내버려 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출애굽기 14:12)”, “"당신들은 지금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나와서 이 모든 회중을 다 굶어 죽게 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16:3)”
모래바람, 사막, 광야, 기약 없는 기다림, 원망, 회개, 광야에서 떠돈 40여년의 여정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이 역사적 사실인지 허구인지는 사실 성경저자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존재의 의미를 탐색했고, 그 과정에서 40여년 광야를 헤맨 시간은 철저히 외지인으로서의 삶, 광야를 헤매는 삶, 곧 인생의 고단함을 강조하는 듯 싶다. 중심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주변으로서의 삶으로서의 막막함, 늘 기대와 어긋나는 다채로운 사건 속에서의 삶의 힘겨움, 광야의 거친 트라우마와 격변에 따른 무게, 늘 주변에 밀려날 위협에 시달리는 일상이 현실에 부여하는 짐, 이런 것들이 배면에 깔려 서사의 발전이 진행되어 온 것이다(Armstrong, K., 2005/2010, p. 79).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게 출애굽기다. 출애굽기는 인생이라는 긴 여정 위에서 길이 보이지 않아 답답한 시간, 벼랑 끝에 선 듯 위태로운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는 인생사의 모습을 전면으로 보여주는 텍스트다. 광야에서 신은 인간의 고단함 앞에서 침묵한다. 모세를 통해 간접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이집트를 탈출할 때 신이 보여주던 보호의 울타리는 사라졌다. 왜일까? 누군가의 보호 없이 인간 스스로 꼿꼿하게 당당하게 서기를 기대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집트 땅에서 출발한지 두 달하고 보름이 되던 날, 사람들은 자신들을 이끌던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다. 음식을 다 떨어졌고 먹을 것을 구할 길은 없었다. 죽음의 공포가 밀려오자 처음 이집트를 탈출할 때의 감격은 원망으로 바뀐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 자기 삶의 주도권을 자신이 쥘 수 있다는 자유인으로서의 희망, 기대와 희망은 광야의 척박함 속에서 무너져 내려간다. 고단한 일상은 더 좋은 내일을 꿈꾸는 이들의 비전을 퇴색시키곤 한다.
이때, 신의 선택은 인간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도, 그렇다고 옹호하지도 않는 것이었다. 적당한 음식과 물을 제공하고, 인간이 각자의 욕망을 조정하며 서로를 도우며 살아야 한다는 심플한 사실을 가르친다. 물론 인간은 신의 이런 기획의도를 잘 간파하지 못한다. 적당히 배가 부르자 다시 불평을 시작하고, 그러자 모세 역시 주변 사람들을 원망하기 시작한다.
"당신들은 어찌하여 나에게 대드십니까? 어찌하여 주님을 시험하십니까?"(출17:2)
출애굽기를 읽다보면 인간의 진면모를 마주하게 된다. 당장의 필요와 장기적 비전, 무엇이 우선인가? 당장의 필요다. 불확실한 미래, 강팍한 현실 위에 감사와 사랑, 불평과 미움, 무엇이 우선인가? 불평과 미움이다. 당장의 필요와 불평과 미움이 내 마음을 지배할 때 무엇을 봐야할까? 출애굽기의 대답은 십계명또는 토라, 즉 언어였다. 잘 안될 줄 알면서도 삶이 흔들릴 때 우리가 의지해야 하는 것은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나그네를 학대하거나 억압해서는 안된다. 너희도이집트 땅에서 몸붙여 살던 나그네였다(출애굽기 22:21)
너희는 과부나 고아를 괴롭히면 안된다. 너희가 그들을 괴롭혀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반드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어주겠다(출애굽기 22: 22-23).
너희가 너희 가운데서 가난하게 사는 나의 백성에게 돈을 꾸어 주었으면, 너희는 그에게 빚쟁이처럼 재촉해서도 안 되고 이자를 받아서도 안 된다. .. 너희가 이웃에게서 겉옷을 담보로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돌려줘야 한다. 그가 덮을 것이라고는 오직 그것뿐이다. 몸을 가릴 것이 그것밖에 없는데 그가 무엇을 덮고 자겠느냐? 그가 나에게 부르짖으면 자애로운 나는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출애굽기 22: 25-27).
근거없는 말, 거짓 증언, 잘못된 다수를 따라가는 것, 가난한 사람의 송사라 해서 치우쳐서 두둔하는 것, 미워하는 사람의 나귀가 짐에 눌러 쓰러진 것을 보고도 그래도 내버려 두는 것, 가난한 사람의 송사라 해서 불리한 판결을 내리는 것, 안 된다(출애굽기 23:1-6).
광야를 헤매는 삶, 이건 비단 출애굽기만의 이야기는 아닐 거다. 나의 마음, 우리의 일상은 자주 광야를 헤맨다. 어디로 갈지 몰라 방황하고, 자주 미워하고, 불평한다. 당장의 필요에 정신을 쏟아보면, 신이 내게 일상적으로 베푸는 기적을 보지도 못한다.
파란 하늘, 시원한 바람, 피어나는 새싹, 누군가의 웃음. 그럴 때 성경에 적힌 언어가 가리키는 곳은 하나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 너의 길 위에 생명과 평화가 넘치게 하라. 삶을 단출하게 하고, 이웃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며, 습관적으로 불평하지도 힘겹다고 말하지도 말라.”
그래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