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검찰권력을 키운 한국 현대사 이야기 2

신직수 - 김기춘 - 우병우로 내려오는 한국 검찰의 롤모델

by 오윤

어느 조직이든 전설적인 인물들이 있다. 후배들 중 누군가는 이 전설을 들으며 언젠가 나도 그런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을 한다. 검찰에서 이 롤모델은 누구였을까? 그 계보는 신직수 - 김기춘 - 우병우로 내려온다. 이번 장에서는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8-1 신직수와 민복기 연합뉴스.jpg 출처: 연합뉴스 ; 최장수 검찰총장(7년 6개월)과 대법원장(10년 2개월) 기록을 달성한 신직수와 민복기


신직수. 그는 한국 현대사에서 군인,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한 전무후무한 인물이다. 박정희와의 개인적 친분으로 36세의 나이에 검찰총장에 올랐다. 36세에 나는 뭘 했더라 돌아보면 , 그리고 현 검찰총장인 윤석렬 총장의 나이가 60세(1960년생)라는 점을 떠올려보면 놀라울 수밖에 없다. 그는 소위 사법고시 출신도 아니고 군법무관 임용시험 출신이다. 6.25 전쟁이 끝나기 1년 전인 1952년 군 법무관 장교로 임용한 후 1961년 12월 육군 소령으로 예편,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법률고문(1961년),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1961년), 중앙정보부 차장(1963년)을 거쳐 1963년부터 1971년까지 검찰조직의 수장으로 만 7년이나 재직한다(딴지일보, 2019, 10, 11). 이후 박정희 정권 시절 법무부 장관(1971년~1973년), 중앙정보부장(1973년~1976년), 등을 거치는데 유신헌법 등 박정권 시절 만들어진 법률 분야는 신직수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게 없다. 공안통치의 초석을 신직수가 쌓았고, 그 모델은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다. 앞 편에 사진으로 소개한 ‘울릉도 거점 간첩단 사건’의 조작도 신직수의 작품인데, 그의 작품 만들기 기법은 그의 후대에도 수십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다. 그는 현재 중앙일보, JTBC의 사주 홍석현씨의 장인이고, 소셜커머스의 대표주자 티켓 몬스터(티몬) 창업자인 신현성 의장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권력층은 이렇게 얽혀있고 이어지는 거다.


8-2 김기춘.jpg 출처: 뉴스타파; 김기춘이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1975년)을 발표할 당시 모습. 재심신청에서 모두 무죄를 받았지만 김기춘의 사과는 없었다.

한편 신직수가 검찰에서 키운 인물이 유신시대의 아들 김기춘이다. 김기춘은 1970년대에서부터 시작하여 2010년대까지 자신이 터미너네이터라도 되는 지 “I will be back"을 외치며 잊을만 하면 한국 현대사에 등장하던 인물이다. 1972년 유신헌법 제정, 1974년 육영수 피살 사건, 1975년 간첩조작사건, 1991년 강기훈 유서 대필사건, 1992년 지역감정을 자극하자는 초원복국집 사건, 가깝게는 2014년 세월호 사건에도 김기춘이 있었다. 그를 정치권력의 무대에 등장시킨 게 신직수였고, 신직수가 그를 키우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야심도 있고 똑똑하면서 그가 5.16 장학생이었다는 것도 작용한다(최강욱 등, 2017).


박정희가 마련한 5.16 장학생으로 청년 시절 공부를 했던 김기춘. 박정희, 전두환 정권 시절 검찰에서 ‘미스터 국가보안법’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승승장구를 하다 노태우 정권 시절의 시작과 함께 검찰총장(1988년~1990년)과 법무부장관(1991년~1992년)을 역임한다. 이후 그의 삶은 여의도로 이동하여 15, 16, 17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2013년 8월 박근혜 정부 제2대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임명된다. 역대 최고령 대통령비서실장이었고, 그의 삶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작성, 관리한 혐의, 세월호 참사 시간을 조작한 협의 등으로 재판을 받고 구속 기소되기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 정치권력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렸다.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굵직굵직한 한국 현대사에 그의 이름은 자주 호명되곤 했던 거다.


8-2 노태우 김기춘 한국일보.jpg 출처: 한국일보 ; 1988년 12월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검찰총장 임명장을 받는 김기춘


이 전설의 첫 단추를 여며준 게 신직수였다. 김기춘을 예쁘게 본 신직수는 그를 늘 비서처럼 데리고 다녔다. 신직수가 법무부장관일 때 김기춘은 그 밑에서 유신헌법을 만들었고, 신직수가 중앙정보부로 옮길 때 김기춘은 대공 수사국장을 지낸다. 그러면서 신직수로부터 나쁜 검사가 되는 노하우는 죄다 전승받는다. 신직수가 법무부 장관, 검찰총장을 지냈듯이 김기춘도 그 경로를 따른다.


이 닮음꼴이 한국의 검찰 조직에 보내는 시그널은 분명했다. 검찰조직에서 승진은 개인에게 너무도 중요한 일이다. 그건 명예와 권한, 그리고 검복을 벗고 자신의 몸값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말기암 판정을 받고 나서도 다음 보직을 걱정하는 게 검사라는 얘기는 그냥 나온 게 아니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신직수와 김기춘의 커리어 경로를 보면서 그 후배들은 무엇을 배웠을까? 이 조직에서 승진을 하고 영향력을 가지려면 저 선배들을 따라야하는구나, 이런 모델이 되어 버리지 않았을까?

8-3 김기춘 우병우 pd수첩.jpg 출처: MBC PD수첩


이 모델을 가장 잘 따른 검사 중 한 명이 우병우다. 우병우가 괜히 리틀 김기춘이라 불리는 게 아니다. 우병우에게는 리틀 김기춘이라는 별명 이외에도 여러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우선 그는 윤석렬 총장 등 현재 검찰의 핵심 인력들이 인정하는 능력 있는 선배 검사다. 이 능력이라는 게 흥미롭다. 우병우는 대학 4학년, 민주화 항쟁이 한참이던 1987년 가장 어린 나이(만 20세)로 사법시험에 합격한다. 똑똑하긴 무지 똑똑한 검사되겠다. 윤석렬 검찰총장이 9수 끝에 30대의 나이(만 31세)에 사시에 합격한 것을 떠올려보면 우병우는 시험의 달인 되겠다. 시험의 달인, 수재 중의 수재 우병우가 사법시험에 합격한 직후 당시 수방사 사령관을 면담하러 간 것은 그의 성향을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다. 친구들이 짱돌을 들고 민주화를 외치던 <1987> 그 시절에 “DJ가 대통령이 되면 군에서 쿠데타를 했을 거다.”라고 이야기하는 수방사 사령관을 찾아가 눈도장을 찍는 스무 살의 우병우. 이 일은 우병우가 검사로서 어떤 길을 걸어갈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단적인 사례였다고 자주 회자되곤 한다(최강욱 등, 2017).


우병우는 검찰청 후배들에게 수사를 잘 하던 검사로도 인정받는다. 도대체 수사를 잘 하는 게 검사의 제일 덕목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지독할 정도로 수사했고, 그 지독함 때문인지, 그가 직접 취조를 맡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우병우는 검찰청 선배들에게 실력은 좋지만 싸가지 없는 검사로 통한다. 공감능력이 제로이고 자기 잘난 맛에 살기 때문이다(이순혁, 2011). 이 잘난 맛에 도취된 우병우는 자신의 검사 생활을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평검사 시절인) 스물세 살 때도 마흔 다섯인 계장(수사관)을 수족 부리듯이 부려먹었다. (지방) 경찰청장도 내 가방을 들어주고 그랬다.(조선일보, 2016, 11, 9)”


하~ 이런 이야기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다니, 분명 내가 사는 세계와 다른 세계에 사는 별종되겠다. 이러다보니 검찰에서 우병우의 별명은 기브스였다. 너무 뻣뻣하다는 게 이유였다. 우병우는 권력에 대한 욕망만큼 관운이 있는 검사이기도 했다. 검사장 승진에 탈락하고도 박근혜 정부 시절 청와대의 실세로 등극하였으니 말이다. 물론 인생이라는 게 한치 앞도 알 수 없어, 이후 그의 삶은 바로 그 관운 때문에 롤러코스터를 탄다. 국정농단 방조 혐의와 불법 사찰 혐의로 법원을 오가고 있다. 그 사이에 검찰청 앞에서 기자를 쏘아 보고, 검창철 안에서 팔짱을 끼고 후배 검사들에게 함박웃음을 날리고, 청문회 증인으로 채택되자 줄행랑 치고, 스무 살에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천재적 머리로 법망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면서 법꾸라지라는 새로운 별명도 얻었다.


8-5 우병우 조선일보.jpg 출처: 조선일보

민주화의 열망이 대한민국을 가득 채웠던 1987년, 스무 살의 최연소 사시 합격자였던 우병우가 30여년이 지난 지금 피의자로 법원을 오가는 모습을 보면 한국 현대사만큼 그의 인생도 드라마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시험합격이 늦은 대학 선배에게도, 전직 대통령에게도, 머리가 허연 고향의 군수에게도 반말과 호통을 서슴지 않던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었던 검사 시절, 주변 사람들과 국민들이 어떤 욕을 하던 나는 너희들의 욕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는다며 엘리트 의식에 쩔어 살았던 민정수석 시절, 국정농단 관계자들이 줄줄이 철창 속으로 잡혀 들어가는 와중에도 끝까지 자기만은 살아남겠다는 주도면밀함을 보이고 있는 피의자 시절, 이 30여년을 관통하는 하나의 단어가 있다면 자기성찰성의 부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어릴적부터 천재라 불렸고, 1등을 놓친 적 없고, 그리하여 반성과 성찰이란 단어는 그의 사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지난 2018년 1월 1심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우병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반성을 하기보다 모든 책임을 위로는 전 대통령, 아래로는 부하 직원에게 전가하고 있다.”

한마디로 우병우는 남에게는 가혹하고, 자기에게는 한없이 관대하며, 반성할 줄 모르고 공감할 줄 모르는 머리만 과도하게 똑똑한 아재 되겠다. 이는 비단 우병우만의 개인적인 한계일까? 우병우의 아이 같은 자존심, 도도한 엘리트의식, 사익과 책임 회피를 위한 주도면밀함, 나만 옳다는 뻔뻔함, 이를 반성할 줄 모르는 자기성찰성의 부재는 비단 그만의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 공익의 대표자로 자부하는 검찰들의 내면에 오랫동안 전승된 사회적 문법 아닐까?


사실 신직수-김기춘-우병우를 줄줄이 비엔나처럼 엮어 서술했지만 신직수와 김기춘이 검찰을 휘어잡던 시대와 우병우가 민정수석의 위치에서 검찰의 인사를 좌지우지 하던 시절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신직수와 김기춘의 시대, 그러니깐 1987년 민주화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법보다 주먹의 힘이 셌고, 그래서 검찰이 하는 일이란 경찰, 중앙정보부, 군대 등에서 휘두른 주먹에 대한 뒷수습 정도였다. 그러나 우병우의 시대, 즉 우병우가 검사로 첫 임용되고, 한국 사회의 민주화가 본격적으로 발걸음을 띠기 시작한 1987년이후 검찰은 정권을 만들고 보위하는 동반자, 더 나아가서는 정권 위에 군림하는 최고의 권력으로 군림하게 된다.


다음 장에서는 민주화 이후 검찰이 어떻게 정치권력화되었는지 그 주요한 국면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참고문헌>

딴지일보 (2019, 10, 11). 검찰청 사람들 2 : 역대 정권과 검찰과의 관계

이순혁 (2011). 검사님의 속사정. 씨네21북스.

조선일보 (2016, 11, 9). 우병우 "23살 때 45세 계장 수족처럼 부렸고, 지방경찰청장이 내 가방 들었다".

최강욱 등 (2017). 권력과 검찰 : 괴물의 탄생과 진화. 창비.

keyword
이전 07화# 7. 검찰권력을 키운 한국 현대사 이야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