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검찰과 언론, 정치권력의 카르텔.
검찰의 위상이 드라마틱하게 바뀌게 된 것은 1990년대다. 1980년대까지 검찰은 경찰, 중앙정보부 등이 불법체포, 감금, 고문, 허위자백 등으로 사건을 조작하면 이를 형사소송 절차 내에서 합법화하는 역할을 한다. 1990년대 들어 업무분장이 바뀌었다. 검찰이 조연에서 직접 사건 조작에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첫 번째 사건이 강기훈 유서 대필 의혹 사건이다.
1991년 5월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이 유서 두 장을 남겨두고 서강대 옥상에서 분신자살한다. 1991년 봄 한국 사회는 여러 대형비리 사건과 대학 캠퍼스의 잇따른 시위가 중첩되면서 정권 입장에서는 혼란스런 정국이었다. 당시 4월부터 6월까지 수서지구 특혜 분양사건, 국회의원 뇌물 외유 사건, 대구 페놀 방류 사건 등 대형비리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고, 정권에 대한 투쟁도 최고조에 달해 3개월 동안 강경대의 죽음을 포함해 13명이 분신, 투신, 의문사로 사망한다(문재인‧김인회, 2011). 이런 상황에서 서강대에서 김기설이 분신자살을 하자, 당시 서강대 총장이었던 박홍은 학생들의 분신에 배후가 있다고 주장한다. 청와대는 치안관계대핵회의를 열고 검찰은 곧바로 분진자살 배후조사에 착수한다.
당시 수사를 맡은 서울지검은 김기설이 쓴 유서를 다른 사람이 작성한 것으로 몰아간다. 이는 청와대와 검찰 수뇌부에 의한 판단이었다(당시 법무부장관은 김기춘, 검찰총장은 ‘범죄와의 전쟁’을 펼치던 정구영이었다). 조작의 핵심은 필적 감정이었다. 수사과정에서 검찰은 불리한 증거는 은폐하고 유리한 증거만 선별해 감정을 의뢰했다(경향신문, 2018, 11, 21). 국과수는 공동감정을 하게 되어 있는 자체 규정을 어기고 한 명이 주도하여 감정을 한다. 감정 후 검찰은 강기훈을 유서 대필자로 구속한 후 자살 방조 혐의와 국가보안법 혐의로 기소한다. 경찰, 중앙정보부 등이 휘두른 주먹을 법적으로 수습하는 정도의 역할을 했던 검찰이 정권을 보호하기 위해 사건을 주도적으로 만들어가는 주인공으로 거듭나기 시작한 시점이다.
검찰의 변화는 김영삼 정부 들어 급격하게 빨라진다. 서슬퍼랬던 전두환 노태우를 구속시킨 주역이 김영삼 정부 시절의 검찰이다. 이 멋진 일을 해놓고는 그때 한 검사가 했던 말이 압권이었다.
맥락은 이랬다. 김영삼 대통령은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을 처벌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군부독재 잔당들과 합당을 해 자기가 대통령이 된 건데 괜히 들쑤셔 적을 만들 필요가 없었던 거다. 그런데 상황이 좀 꼬였다. 당시 저작거리에는 “전직 대통령 중 한 사람의 차명계좌에 4,000억원”이 있다는 풍문이 떠돌았다. 이 풍문을 예의주시한 박계동 국회의원이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어마무시한 비자금이 예치되어 있다.”고 폭로한다. 1995년 10월의 일이었다. 논란이 커지고, 여기저기서 물증이 나오자 노태우 전 대통령은 훌쩍거리며 대국민 사과를 한다. 이때 노태우 스스로 밝힌 비자금 내역이 무려 4,500억 원이었다. 25년 전에 4,5000억 원이라면 지금으로 치면 1조 정도 되는 어마무시한 금액이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노태우가 비자금을 인정하니, 김대중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총재가 나도 대선 무렵에 노태우로부터 20억 원을 받았다고 시인해버린다. 이러다보니 불똥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아니 김대중도 20억을 받았다면 도대체 김영삼은 얼마를 받은 거야? 이게 대선자금 문제로 번진다. 아주 먼 훗날 노태우의 회고록에 의하면 그때 김영삼 대통령이 노태우로부터 받은 돈은 2000억에서 3000억 정도 된다.
그러나 이것은 나중에 알려진 이야기이고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발뺌을 한다. “1992년 대선자금 관련 자료가 없어 이를 공개하지 못한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거짓말을 할수록 여론은 안 좋아졌고, 설상가상 1995년 지방선거에서 여당은 참패를 했으며, JP 김종필이 탈당하고, 제 5공화국의 주요 실세 TK들이 모여 TK 신당을 창당하려 한다는 풍문이 돌았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던 김영삼 정권은 검찰을 활용한다.
그해 12월 김영삼 대통령 특별 지시로 서울지검에 12·12와 5·18 특별수사본부가 설치된 것이다. 동시에 5.18 특별법을 제정한다. 이 특별법은 12.12.사태와 5.18 민주화항쟁 때 발생한 헌정질서 파괴 범죄행위에 대해 공소시효를 정지해버린다는 법률로, 검찰은 이 법률에 근거하여 공소시효 만료 하루 전날(1996년 1월 23일) 전두환 등 신군부 인사를 내란죄 및 반란죄 협의로 기소한다(최강욱, 2017).
결과만 놓고 보면 이는 검찰이 과거의 군부 정권을 처벌한 훌륭한 사례였다. 하지만 “야 너희 수사해!”라는 대통령 지시가 없었으면 절대 움직이지 않았을 검찰이었다. 실제로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검찰은 전두환 등 신 군부 인사 관련 고소에서 기소유예, 불기소처분, 공소권 없음 등을 남발하는 상황이었다. 불과 한두달 전까지만 해도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해괴망측한 논리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게 면죄부를 줬던 검찰이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그들을 잡아넣기 위한 수사에 들어가고, 이에 대해 저작거리에서 검찰을 조롱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자 검사들이 자조적으로 한 말이 이거였다.
김영삼 정권 시절 검찰이 얼마나 정치권력에 유용했는지 김영삼 대통령은 “장관 20명과 검찰총장 한 명을 안 바꾼다”라고 말할 정도였다(최강욱, 2017).
검찰이 현재 정치권력의 가장 유용한 동반자이면서 다음 정치권력의 향배를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것도 김영삼 정권 때부터다. 1997년 대선 시즌, 이회창 대통령 후보를 비롯하여 신한국당 의원들이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자금 자료를 검찰에 내면서 수사를 해야 한다고 압박을 넣는다.
'사건번호 '97 형제 110147'.
신한국당의 정식 고소장을 접수한 검찰은 이 사건을 대검 중수부에 사건번호를 붙여 배당했다. 당시 이 사건의 수사기획관은 김태정 검찰총장의 광주고 후배인 박주선 검사였다. 어느 날 박주선 검사(현 바른미래당 국회의원)는 김태정 총장을 만나 이런 이야기를 전한다.
“형님 이러면 광주에서 민란이 일어날 겁니다”
김태정 검찰총장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대선 후까지 수사를 유보하겠다고 발표한다. 과거의 정치자금에 대하여 정치권 대부분이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사건을 수사할 경우 대선을 앞두고 극심한 국론분열과 대혼란이 올 것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이 선택은 당시 정국의 방향을 틀어놓는 놀라운 선택이라 평가된다(프레시안, 2002, 11, 27). 이후 대선에서 승리한 김대중 대통령은 김태정 총장을 유임하는 것으로 신임을 과시하는데, 그때 검찰은 이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사실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검찰청에 긴장한 검사들이 많았다고 한다. 본인들이 사형을 구형했던 인물인데다 대통령 선거 전날까지 모 서울지검장이 공안부 검사를 불러 이회창 만세를 말하던 검찰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총장이었던 김태정 총장이 검찰 역사에서 최초의 호남 출신 총장이었다는 것만 보더라도, 그리고 김태정 총장도 공식적으로는 자신의 출신을 부산으로 적어 놓고, 다른 검사들과 달리 광주딱지가 붙은 출신 고등학교를 밝히지 않았을 정도로 다른 어느 공직 사회보다 호남에 대한 차별은 컸으니 김대중 대통령 당선이 검찰에게는 반가운 일만은 아니었다(중앙일보, 2002, 2, 23).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이 고함 한마디 치지 않고 검찰을 찾아 쿨하게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라는 문장을 써준다.
정권 초기 김대중 대통령은 진심으로 “검찰 바로 세우기”에 힘을 쏟으려 했던 듯싶다. 검찰의 정치적 독립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몸으로 체험했던 그는 광주고 출신의 박주선, 김태정 두 사람을 전면에 세워 검찰 개혁을 진행하려 했다. 특히 청와대 법무비서관으로 선발한 “박주선”에 대한 기대감이 컸고, “박주선” 자신도 의지가 강했다. 집권 초기 공직사회에 대한 강도 높은 사정으로 부정과 비리를 단죄하던 시기, 대통령이 검찰의 독립성을 강조하고 있는 만큼 지금이야말로 검찰이 제 위상을 찾을 수 있는 호기라고 생각한 박주선은 “사정은 조용하지만 지속적으로 해야 하고 검찰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며 검찰의 독립성을 강조했다. 대통령 역시 이에 호응하며 청와대 수석회의에서 ‘관련 수석 외에는 검찰 수사에 대해 일체 언급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린다(박주선, 2009).
문제는 지난 50년간 내려온 견고한 권력 카르텔이었다. 검찰 수사의 화살이 정치권력, 경제권력, 언론권력의 핵심에 예외 없이 다가가다 보니 사대문 안에서 “내 저 새끼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원성이 자자했다. 검찰 내부에서도 라인을 달리하는 정치 검찰 세력들이 김대중-박주선-김태정에 반대하는 정치권력과 여론에 조응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옷로비 사건이 터졌다. 1999년 5월 김대중대통령이 법무부장관에 검찰총장 김태정을 임명했는데, 바로 다음 날 언론에 옷 로비 사건이 터진 거다. 1998년 말 장관과 검찰총장 부인들이 어울려 다니며 고급 옷을 구입하고 재벌 회장 부인에게 옷값을 대납해 달라고 했다는 것인데, 그 문제의 검찰총장이 김태정이었고, 그 재벌 부인을 은밀하게 조사하고 있는 권력 실세가 있는데, 그 문제의 권력 실세가 법무비서관 박주선이라는 거였다. 김대중 대통령이 “이건 마냥사냥”이라 말했는데, 실제로 아무 것도 아닌 사건이었다. 몇몇 부인들이 호피무늬 코트의 구입과 반환시점, 대납 요구들에 대해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인데, 이 아줌마들의 거짓말로 헌정사상 최초 특검이 도입되고, 김태정, 박주선씨는 구속되었고, 정국은 1년 내내 이 문제로 시끄러웠다. 오랜 법정 논쟁 끝에 이 사건은 실체없는 해프닝으로 종결되고, ‘옷로비 사건’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앙드레김’의 본명이 ‘김봉남’이라는 게 전부다(강준만, 2006).
구속 후 풀려난 김태정은 정치권으로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 법률사무소 로시컴과 로시컴법률재단을 설립한다. 인터넷으로 무료 상담을 해주고 변호사를 선임해주는 회사인데, 그는 옷로비 사건 이후 정치권력과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조금은 후미진 세상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 듯싶다. 정치권력과 멀리 떨어지자 검찰과 언론의 김태정 전 검찰총장에 대한 관심도 회수된다. 이와 반대로 구속 후 풀려난 박주선은 정치권의 중심으로 들어갔고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다. 4번에 걸쳐 국회의원이 됐고, 그 사이에 4번 구속되고, 4번 무죄를 받는 진기록을 세운다. 정치권력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검찰, 언론, 정치권력의 견제와 감시는 집요했고, 그 사이 재판과정에서 검찰로부터 받은 구형은 16년이고 감옥에서 409일을 보냈다.
김태정과 박주선의 지난 20년을 비교해보면 한국에서 정치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검찰을 배경으로 한 조인성, 정우성 주연의 <더 킹>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정치인이란 말이야 반드시 당한 것에는 보복을 해야 한다. 이게 아주 복잡한 정치 엔지니어링의 철학이거든.” 이 보복에는 언론, 검찰 등 소위 정치권력과 맞먹는 힘을 가진 권력들이 동시에 이용된다. 정치권력과 검찰, 그리고 언론이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시끌벅적했던 옷로비 사건은 잘 설명되지 않는다. 이후 김태정과 박주선이 경험하게 되는 완벽히 다른 삶도 잘 설명되지 않는다. 권력을 잡은 자, 검찰의 힘을 빌러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빼앗긴 자, 검찰에 의해 집요하게 괴롭힘을 당하는 무대, 그 무대에 들어서고자 하는 자는 이 복잡한 엔지니어링을 받아들여야 했던 거다. 아니면 이 무대에서 떠나거나...
이 이상한 정치 엔지니어링의 철학을 바꾸려 했던 김대중 대통령은 옷로비 사건으로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 검찰조직을 정치권력으로부터 완벽히 독립시키고, 중립적인 노선을 가지게 할 수 있다는데 자신감도 잃어버린 것 같다. 설상가상 조폐공사 파업 유도 사건, 이용호 게이트 등이 나왔다. 계속 특검이었다. 일이 연달아 터지니 감당이 안 되는 거였다. 그러다보니 호남 출신 중용이 지나칠 정도로 급속히 많이 이루어졌다. 당시 신승남씨가 검찰 내에서 차장임에도 불구하고 총장 제치고 법무부 장관 제치고 모든 결정을 내렸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IMF 극복이 중요한데 검찰에서 자꾸 잡음이 나오는 거다. 개혁이고 뭐고 일단 틀어막고 가자했는데, 틀어막자니 호남 출신들이 몇 명 안되는 거였다. 그래서 다 끌어다 중용했다. 그 때문에 부작용이 많이 생겼고 노무현정부로 이어지면서 부담이 된 측면이 있다(최강욱 등, 2017).
부담은 부담이고, 노무현 정부는 다시 한 번 정치권력-언론-검찰의 메커니즘을 바꾸려는 개혁의 시동을 건다. 그러나 이 시동은 제대로 걸리기도 전에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아 어쩌지?’하고 주변을 보니 도와줄 사람 하나 없는 사막 한 복판이었다.
<참고문헌>
강준만 (2006). <한국 현대사 산책 : 1990년대편 1~3권>. 인물과 사상사.
경향신문 (2018, 11, 21). 검찰과거사위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은 노태우 정권 지시에 의한 조작.
문재인 ‧ 김인회(2011). <검찰을 생각한다 : 권력검찰의 본질을 비판한다>. 오월의 봄.
박주선 (2009). 박주선과 호남, 시련에서 영광으로. 박주선 홈페이지.
중앙일보 (2002, 2, 23), [인물탐구]김태정 전 검찰총장의 '영욕'.
최강욱 등 (2017). 권력과 검찰 : 괴물의 탄생과 진화. 창비.
프레시안 (2002, 11, 27). 김태정, "DJ비자금 수사 않겠다" 폭탄선언 <손광식의 '1997 비망록'> (41) 검찰총장의 반전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