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부터 1987년까지
일제시대. 당시 공권력의 중심은 경찰이었다. 그러니깐 저작거리에서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검사가 아니라 순사였다. 우리가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 자주 보는 순사(경찰)의 인권 탄압, 남발하는 고문과 가혹행위, 피고인의 무권리 상태 등등은 모두 경찰서를 배경으로 한다. 당시 경찰은 ‘범죄즉결례’라 하여 3개월 이하의 징역은 자기들이 판사가 되어 처할 수도 있었고, 영장 없이 구속도 가능했으며, 매질도 합법이었다. 1912년 제정된 조선형사령에 근거하여 제도적으로는 검사가 경찰을 지휘하고 통제할 수 있었지만 인원이 극히 적어 거의 눈에 띄지 않았고 통제력을 행사하지도 못했다(문재인 ‧ 김인회, 2011).
100년 전 현실에서는 거의 힘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당시 구성된 검찰제도는 100년이 지난 지금, 한국사회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에 대해 문준영(2009)은 이 시기 제정된 법제와 이론이 이후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을 크게 세 가지로 본다.
첫째, 검찰중심의 수사체계가 마련됐다. 일제시대 주목해서 봐야 할 법령은 크게 3가지인데, 1912년 조선형사령, 1937년 만주국 형사소송법((1937년 만주국칙령 제23호), 그리고 전쟁과 맞물려 1941년 제정된 일본의 국방보안법 및 치안유지법상의 특별형사절차. 이들 법들이 일관되게 지향하는 바는 국가의 공권력 행사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검사를 중심으로 한 일원적 수사체계’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또 하나 공판에 있어서는 예심제를 폐지했는데, 이전에는 재판 이전에 예심이라는 게 있어 피의자와 증인의 신문, 소환, 구속, 압수, 수색 등 강제수사권은 원칙적으로 예심판사가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이게 프랑스 치죄법을 받아들인 대륙법계의 특징이었다고 한다). 이때 검사는 뭐 했냐구? 고소, 고발 및 경찰의 조사에 근거하여 사안을 평가한 후, 중한 범죄 및 난해한 사건은 예심판사에게 예심을 청구하고, 혐의가 명백하고 가벼운 범죄는 곧장 법원 재판에 회부하는 것이었다(문준영, 2009). 말 그대로 사건 당사자와/경찰과 법원의 중개 역할에 머물렀는데 예심제를 폐지하면서 일체의 범죄수사는 검찰과 경찰에 맡겼다. 예심제를 폐지한 것은 예심이라는 제도에 의해 법원에서 과도한 인권유린이 양산되고 있다는 인식때문이었다고 한다.
둘째, 검찰총장 제도가 마련됐다. 사실 처음 검찰이라는 조직이 마련되었을 때 총장은 상징적 존재였다고 한다. 모두가 법전문가인 상황에서 실질적인 현장의 지휘감독자는 각 법원(공소원)의 검사장이었던 거다. 상징이었던 총장의 현실의 실세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 초반 줄줄이 비엔나처럼 일본에서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정경유착 사건에서 검찰총장(검사총장)이 정치 무대의 주인공으로 서기 시작하면서다. 검찰총장이 직접 수사진을 조직하고 수사를 진두지휘하면서 그 결과에 따라 내각을 붕괴시키거나 그걸 무기로 정치적 거래를 하게 되면서 막강한 정치적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고 한다. 검찰총장의 위상이 강화되면서 검찰을 통제하는 법무부장관(사법대신)의 지휘관 행사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다. “너는 나(검찰총장)를 통하지 않고는 검찰의 구체적 사건에 개입할 수 없다.”는 입법론이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다.
셋째, 검사동일체 원칙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원래 검사동일체 원칙은 개별 검사들의 법률행위에 통일된 효과를 부여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문재인‧김인회, 2011). 그런데 이때부터 검사동일체 원칙은 전국의 검사가 검찰총장을 정점으로 상하의 위계질서를 이루면서 하나의 기관처럼 활동하게 하는 조직원리로 변질한다. 검사는 공무원이고 행정부의 하위 조직이며, 그렇다면 검찰이 정부에 종속되어 위계적으로 조직, 관리되는 것 자체는 입헌민주주의 관점에서 정당하며 필요하다. 그런데 이 문제가 왜곡된 검사동일체 원칙에 결합하여 법무부장관(사법대신)은 검찰의 상관이 아니고, 검찰은 명백히 독립된 기관이라는 이념과 결합해버린다. 개개의 검사가 단독 관청이라는 의미로 공권력 집행 과정에서의 통일성과 책임성을 부여하기 위해 발전한 검사동일체 원리가 이상하게 검찰의 안과 밖을 가르는 개념으로 변질된 것이다. 이러다보니 검사동일체 원리는 까라면 까야지 하는 검찰 조직의 상명하복의 원리, 일사불란한 행동 통일의 원칙과 동일시되어버렸고, 결국 이것은 폐쇄적인 조직 이데올로기로 전락해버린다.
일제시대의 검찰 제도를 관찰하다보면, 비록 그때에는 경찰(순사)의 권력 때문에 저작거리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그 제도가 100여 년 동안 큰 변화 없이 이어지고, 민주주의의 성장과 함께 제도와 저작거리 사이의 간극이 좁아지기 시작하면서 2019년 한국 사회에는 너무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니깐 100년 전 제도가 배태한 문제는 100년 후 현실의 문제로 폭발하고 있는 거다.
그렇다면 해방 직후 한국 현대사에서 검찰 제도는 어떻게 이어졌고, 그것이 현실에서 발현되는 특징은 무엇일까? 해방 후 한국의 경찰은 일제 시대 순사들이 그대로 이어받는다. 이들은 해방 전과 마찬가지로 저작거리에서 국가의 이름으로 몽둥이와 총칼을 휘두르는 주인공이었다. 정치적 지지 세력이 부족했던 이승만은 일제시대 이미 숙달되고 노련해진 순사들을 적극 활용하여 반대파를 제거하고, 좌익들을 척결한다. 당시 경찰의 힘이 얼마나 셌는지 경찰이 ‘현직 검사’를 총살한 사건이 있을 정도였고, 경찰 수사과장이 검찰총장을 암살하려 하기도 했다(최강욱, 2017). 경찰의 위세는 컸고, 그런 저작거리에서 검사들이 하는 일이라는 것은 경찰 눈치를 보며, 그들이 저지른 일을 뒤처리하는 수준이었다.
법과 제도라는 것은 당시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듯싶다. 물론 일제강점기의 잔재인 사법체계를 극복해야 한다는 개혁의 목소리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목소리보다 과거의 관행을 그대로 잇는 힘이 더 강했다. 그러다보니 일제 강점기의 법체계가 그대로 이어진다. 여기에는 가뜩이나 경찰의 힘이 센데 제도적으로 경찰에 수사권을 전적으로 맡기면 안 된다는 정서도 크게 작용했다. 경찰의 파쇼를 막기 위해 ‘검찰파쇼’를 가져오는 게 좋다는 논리였다(문재인‧김인회, 2011). 그리하여 해방 후 처음으로 제정된 1954년 형사소송법에는 1) 검찰의 수사권과 사법경찰에 대한 수사지휘권 인정 2)검찰 내 사법경찰 인력 도입 3) 검찰 작성 피의자 신문조서 증거능력 인정(이와 대비되게 사법 경찰관 작성 조서의 경우 피고인이 법정에서 그 내용을 부인할 경우 증거 불인정) 4) 사법경찰관의 강제수사에 대한 검사의 영장 통제 등을 규정했다(한겨레신문, 2019, 10, 5).
법적인 차원에서는 검찰의 힘이 셌지만 1987년 민주화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법보다 주먹의 힘이 셌고, 그래서 검찰이 하는 일이란 경찰, 중앙정보부, 군대 등에서 휘두른 주먹에 대한 뒷수습 정도였다. 몇 가지 뒤처리 사례.
우선 정치적 정적의 제거. 1958년 총선을 앞두고 이승만의 정적이었던 조봉암을 빨갱이라 딱지 붙여 형사절차를 동원하여 사형 선고를 한다. 좀 더 가깝게는 1980년 전두환을 앞세운 신군부의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유력 정치인이었던 김대중을 내란혐의로 군법회의에 기소했고, 군검찰은 사형을 구형한다(문재인‧김인회, 2011).
다음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너무도 많아 세기도 힘든 대국민 간첩 만들기 프로젝트. 중앙정보부, 경찰 등이 불법구금, 고문, 거짓자백을 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 후 검찰로 장이 넘어가면 검사들은 “기소-절차 진행-형 집행”을 담당했다. 2005년 12월 출범 후 2010년까지 활동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에 의하면 134건의 진상규명 인권 침해 사건 중 36건이 간첩 조작 의혹 사건이었다니 얼마나 많은 간첩이 만들어졌는지 이루 헤아릴 수 없고, 검사들은 때론 직접 수사를 통해 주인공 악당이 되기도 했고, 때론 공소와 형 집행 등을 통해 뒤처리 조역을 맡기도 했다(문재인‧김인회, 2011).
누군가는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겠다. 아니 수십 년의 역사에서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의혈 검사는 없었어? 그러니깐 부당한 국가기관의 공권력 행사에 “이건 아니죠!”하고 맞짱 뜬 놈은 없었던 거야? 사실 세상이 그래도 조금씩 앞으로 가는 건 그런 똘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검찰 조직에는 이런 친구들이 자리 잡을 공간이 거의 없다는 거다. 가끔 그런 친구들이 있었다 해도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하며 검복을 벗고 변호사나 교수로 업종 변경을 택했다. 그리고 이런 사례도 아주 아주 극히 극히 드물었다.
똘아이 사건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과 1987년 6.10 민주항쟁을 촉발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다. ‘1차 인혁당 사건’은 1964년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대한민국을 전복하라는 북한의 노선에 따라 움직이는 반국가단체로 각계각층 인사들을 포섭해 당 조직을 확장하려다 발각됐다”고 발표하면서 시작됐는데 바톤을 이어받은 서울지검 공안부(부장검사 이용훈) 검사들이 “아니 증거도 없고 피의자들이 고문을 심하게 당했는데 어떻게 기소하냐며” 버텼다. 당시 검찰총장은 신직수라고 한국 검찰 역사에 있어 최장기 황태자였는데 반발하는 공안부 검사들을 불러 “기소를 하든 사표를 쓰든 둘 중에 하나를 해!”라고 소리를 지르니 이 친구들이 다 사표 쓰고 검찰청을 떠나버린 거다(최강욱, 2017). 검사들이 이렇게 세게 나오니 법원도 무겁게 때릴 수는 없었는지 가벼운 형량으로 1차 인혁당 사건은 마무리된다. “1차 인혁당 사건”은 어찌보면 한국 검찰의 역사에서 매우 자랑스런 선례인데, 검찰이 이 역사를 자랑할 수 없는 것은 10년 후 “2차 인혁당 사건”에 저지른 만행이 해도 너무했기 때문이다. 1974년 봄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시위를 시도하던 대학생들을 탄압하기 위해 중앙정보부는 또다시 이들의 배후조직으로 인혁당 재건위라는 실체 없는 조직사건을 만들어내는데, 이때 검찰은 대법원 판결이 확정된지 18시간 만에 8명에 대한 사형을 집행해 국제적 지탄을 받았다. 당시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국제법학자회는 사형이 집행된 4월 9일을 ‘사법 암흑의 날’로 선포할 정도였다(한겨레, 2019, 4, 6).
2차 인혁당 사건 때문에 잘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1차 인혁당 사건에서 보여준 똘아이 검사들의 행보는 부당한 공권력에 검찰들이 저항을 할 경우, 그것이 법원의 판결과 한국사회에 어떤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987년 6.10 민주항쟁을 촉발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보다 잘 알려진 긍정적 의미의 사례다. 영화 <1987>로 주목을 받은 6.10 민주항쟁은 기실 박종철 고문치사를 사건을 앞에 둔 검사, 기자, 의사 등 각 영역에서의 똘끼가 만들어낸 합작품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김형민, 2017, 12, 26). 이승만, 박정희 그리고 이어진 전두환 정권, 이 시절 역시 저작거리의 무소불위 권력은 검찰이 아니라 안기부와 경찰에 있었다. 경찰의 경우 법적으로는 ‘검사의 지휘를 받아 수사한다’는 원칙이 있었지만 검찰을 무시하기 일쑤였고, 특히 <1987> 영화에서도 그려졌지만 경찰 산하 대공수사팀의 힘은 무소불위였다. 이 강력한 힘에 비해 너무도 왜소한 검사의 힘에 대해 당시 한 언론은 이렇게 표현한다. “검찰이 자꾸 왜소화하고 움츠러들면서 몸조심하는 타성에 젖다 보니 오늘날과 같은 엄청난 일이 초래됐다는 분석이다(...) 경찰 수사를 거의 그대로 추인하는 선에서 수사를 매듭지음으로써 지나치게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동아일보, 1987, 5,25)”
이 소극적 태도에 나름 똘끼어린 저항을 했던 사람이 영화 <1987>에서 하정우가 역을 맡은 최환 검사장이다. 영화에서는 매우 똘끼있게 그려졌지만, 실제 최환 검사는 1987년 그때를 부끄럽게 기억한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는 하정우의 캐릭터때문이 아니라 그의 부끄러운 후회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만약 검찰의 역사에서 이런 목소리와 이런 똘끼들이 후배들의 좋은 표본이 되었다면 2019년 검찰의 모습은 지금과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였다.
검찰 역사에 있어 후배들의 모델이 된 사람은 신직수 - 김기춘 - 우병우로 이어진다. (다음편에 계속 )
<참고문헌>
김형민 (2017, 12, 26). 1987년, 검사·기자·의사는 용감했다 : <1987> 박종철 사망사건 뒷 이야기. 뉴스톱.
동아일보 (1987, 5, 25). 경찰 힘 못꺽는 검찰 '권위'.
문재인 ‧ 김인회 (2011). 검찰을 생각한다 : 권력검찰의 본질을 비판한다. 오월의 봄.
문준영 (2009). 한국적 검찰제도의 형성. <내일을 여는 역사>, 36호, p. 20~54.
SBS (2018, 1, 21). 1987년, 진실을 지켰지만 부끄러웠던 검사. 스브스뉴스.
최강욱 등 (2017). 권력과 검찰 : 괴물의 탄생과 진화. 창비.
한겨레 (2019, 4, 6). 국가가 씌운 인혁당 ‘빚 고문’ 촛불정부가 과감히 풀어야.
한겨레 (2019, 10, 5). 124년의 검찰권력, 일제가 낳고 보안법이 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