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검찰개혁의 대서사시
검찰 자체가 정치적으로 편향되어 있으면 정치적 중립을 보장해주어도 정치적 중립은 지켜지지 않는다... 검경수사권 조정과 공수처 설치를 밀어붙이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스러웠다. 이러한 제도적 개혁을 하지 않고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려 한 것은 미련한 짓이었다(노무현, 2010, 운명이다)
그랬다. 누구보다 검찰개혁을 원했던 노무현 정부의 검찰 개혁은 실패였다. 가장 큰 이유는 정부도, 시민사회도 검찰을 기본적으로 신뢰했다. 가장 능력 있고 청렴하며 공정하고 친인권적이라는 믿음. 그리고 낙관적 전망(문재인‧김인회, 2011). 과도하게 검찰의 선함과 능력을 믿었다.
"정치적 중립을 보장해주면 스스로 편향성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야!"
제도를 만들 때는 성선설에 기반하여 만들면 안 된다는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지금이야 검찰 개혁을 외치며 검찰에 대한 불신이 하늘을 찌를듯하지만 노무현 정권 당시 검찰의 인기가 너무 높았다. 이것도 개혁을 추동하기 어려운 이유였다. 여야를 가리지 않는 불법대선 자금 수사로 안대희는 국민 검사가 됐고, 대검찰청으로 선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노무현 대통령이 “내 대선자금도 전부 수사”하라며 판을 깔아주고, 정치적 간섭이나 개입을 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만들어진 판이었다. 하지만, 대선 수사가 너무 기막히게 잘 돼 검찰개혁의 명분이 약화됐다. 대검 중수부를 해체하고 공수처를 설치할 경우 대선 자금 수사에 대한 청와대의 보복으로 읽힐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집권 초기부터 검찰과 거리를 벌리려 했던 노무현 대통령의 행보가 검찰에게는 “나는 너희가 싫다”라는 포즈로 읽히면서 검사들의 조직 논리가 과하게 세진 것도 개혁을 어렵게 만든 이유였다. 노대통령은 검찰을 좋아하지 않았고, 검찰 그 누구도 노대통령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검찰의 오만불손함을 전 국민이 알게 된 계기가 2003년 생중계된 대통령과 검사와의 대화였다. 고졸 출신이라며 조롱하는가 하면, 피의자를 대하듯 심문하기도 했다. 노대통령이 “이쯤되면 막가자는 것이죠.”라고 던진 말이 유행어가 될 정도였다.
검찰은 자신들을 간섭하지 않는 독립, 대통령도, 법무부장관도 건들지 않는 특별대우를 원했다. 왜 이런 특별대우를 원하게 되었을까? 일단 취임 후 첫 번째 단추가 잘못 꿰어졌다. 노무현 정권이 들어선 후 구체적인 사정을 살피지 않고 국민의 정부(김대중 정부) 시절 요직을 거친 사람들을 정치검사라는 딱지를 붙여 배척했다. 호남 출신 검사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이다. 이게 검찰 내부의 공분을 샀다. 설상가상 첫 번째 법무부장관으로 변호사 출신 강금실 장관을 선정했는데, 이는 검찰개혁의 수준과 방법이 상상을 초월할 것이라는 예측으로 이어졌다. 자연스레 방어적이 되었다. 검찰들은 검찰총장을 중심으로 검찰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똘똘 뭉치기 시작했다(문재인‧김인회, 2011).
검찰총장의 인선에 실패한 것도 검찰개혁을 어렵게 만든 이유였다. 노무현 정부 시절,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은 자주 부딪쳤다. 참여정부 시절 첫 경찰총장으로 임명된 송광수 총장은 노무현 정부의 검찰개혁안 중에서도 '중수부 폐지안'에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첫 여성 법무부장관인 강금실 장관을 대놓고 무시하면서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송광수 총장에 이어 총장에 오른 김종빈 총장은 강정구 동국대 교수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에 대한 천정배 법무부 장관의 불구속수사지휘에 반발해 사표를 던졌다(딴지일보, 2019, 10, 11).
노무현 정부 시절 검찰개혁에는 실패했지만, 제도적으로 형사소송법 개정 등 사법개혁에는 일정부분의 성과를 보인다. 무엇보다 형사소송 과정에서 피의자(피고인)의 권리가 강화된다. 국선변호인제도가 재판 시작 전 단계로까지 확충되었고, 법관에 의한 구속영장 실질심사제가 도입되면서 실무관행도 변했다. 이전에는 판사가 구속영장 신청을 서류로만 보고 구속여부를 결정했다면, 구속영장실질심사제 도입 이후에는 판사가 직접 피의자를 만나 이야기를 듣고 결정하게 되었다. 이 효과는 놀라운 수치로 나타났다(문재인‧김인회, 2011).
법원에 접수된 사건 수 1995년 219만건 → 2000년 213만건 → 2009년 198만건.
검찰이 처리한 사건 수 1995년 189만건 → 2000년 238만건 → 2008년 273만건
구속영장 발부 수 1995년 14만견 → 2000년 11만건 → 2009년 4만건
구석기소 인원수 1995년 11만명 → 2000년 9만명 → 2009년 4만명
구속기소율 1995년 67% → 2000년 46%,→ 2009년 14%
검찰이 처리한 사건 수는 증가했지만 구속자수는 급격하게 줄어든 거다. 이는 이전의 검찰의 구속영장 신청이 과도했음을 보여주고, 동시에 법원의 검찰 견제 기능이 정상화되었음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서는 굳이 경찰이 검사에게 영장을 신청하고, 검사가 다시 법관에게 영장을 청구하는 절차가 불필요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검사가 영장청구권을 독점해야 하는 이유가 없음을 보여준다 하겠다(문재인, 김인회, 2011).
형사소송법 개정이 피의자(피고인)의 권리를 실질적으로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면 검찰청법 개정은 검찰조직의 중립성을 강화하는 제도적 틀을 마련했다고 평가된다. 가령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에 대한 인사청문회 제도를 도입해 최악의 인사를 배제하는 틀을 마련했고,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담보하는 방편으로 검사 보직과 관련해 대통령이 최종 제청하지만 검찰총장의 의견 개진권을 도입했다. 아울러 제도적으로는 검찰총장을 제외한 모든 검사 직급을 일원화해 검찰총장과 검사로 구분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누군가는 그게 검찰의 중립성과 무슨 상관이야! 아리송한 사람들도 있을 거다. 실은 나도 그렇다. 이에 대해 문재인과 김인회(2011)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검찰청법 개정을 통해 정치적 중립 보장을 위한 제도적 과제는 거의 완수했다. 하지만 검찰의 정치적 중립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참여정부 이후 정치권력과 검찰의 결탁은 노골화되었고 정치검찰은 정권의 주구가 되었다. 왜 그런가?...우선 정치적 중립과 관련한 제도들이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는 데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검찰총장 인사청문회는 최악의 인사를 배제하는데 적합할 뿐 적극적으로 검찰의 정치적 중립에 적합한 인물을 선정하는 제도는 아니다. 검사 직급 일원화도 제도상으로 이루어졌을 뿐 실제 직위에서 차이는 그대로 존속한다. 검사 보직시 검찰총장의 의견개진권은 검찰의 정치적 중립에 도움이 되지만 지나치게 검찰총장의 의견에 구속되면 검찰의 민주적 통제를 포기하는 결과가 된다. .... 마지막으로 이들 제도의 공통적인 약점은 정치적 중립 보장이 민주적 통제와 결합되지 않으면 통제의 공백이 생긴다는 점이다. 그 결과는 검찰 권한 확장이다.(문재인 ‧김인회, 2011, p. 162)”
그러니깐 참여정부 시절의 뼈아픈 아쉬움은 검찰의 정치적 중립과 동시에 민주적 통제를 위한 시스템을 마련해야 했는데, 이걸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집중된 검찰 권력을 분산하고, 견제하는 장치가 필요했는데 이것이 지연되면서 나타난 문제는 이명박, 박근혜 정권과 맞물려 폭발한다. 이해할 수 없는 수사와 기소가 계속됐다. 노무현 대통령 수사, 한명숙 전 총리 수사, PD수첩 기소, 정연주 KBS 사장 기소, 환경운동연합 수사, 미네르바 재판, 촛불집회 수사, 용산참사 사건 수사, 간첩 조작사건 , 유성기업, 쌍용차 등 생존권투쟁에 대한 탄압, 청와대 민간인 사찰 사건 등등 사실 한 사건 한 사건 그것을 일일이 설명하는 것이 어려울만큼 무리한 수사와 기소가 반복됐다.
이에 더해 검사 비리 사건이 줄줄이 터졌다. 대표적 두 가지 사례. 2010년 ‘부산지검 스폰서 검사 사건’. 부산지역 건설업자 정용재가 40여명의 검사들에게 촌지와 성접대를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이 사건은 무혐의 처리되었고 법원에선 전원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접대도 이루어졌고 돈도 건네졌지만 직무와 관련한 대가성이 없다는 거였다. 2016년 고교동창을 스폰서로 둔 “김형준 부장검사 스폰서 사건”. 수사 과정 중에 김검사와 동료 검사들이 성매매 접대를 받은 정황과 증거가 나왔고, 스폰서 김씨는 김형준 검사의 술값 대부분과 김 검사의 내연녀 생활비까지 부담했다고 주장하지만 검찰은 오랜 시간 묵살했다.
너무도 많은 비리 사건이 끊임없이 터졌는데 당사자와 지역, 시간만 다를 뿐 사건 내용과 처리 과정은 판박이였다. 뇌물과 향응 및 성접대, 밝혀지면? ‘우리가 남이가!’. 검찰은 자신들의 비리 의혹에 대해 갖가지 이유를 대며 모르쇠로 일관했고, 제 식구의 비리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너그러웠다. 이 정도가 너무 심해서, 검찰에 대한 나름 우호적인 조선일보조차 논설에서 다음과 같이 개탄한다.
“대부분의 뇌물과 향응은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 경우 선처해줄 것을 바라는 보험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런데도 검찰은 자기들이 관계되면 대가성을 좁게 해석해 처벌을 피해 나간다(조선일보, 2010, 6, 10)."
한국 현대사에서 검찰의 역사를 정리하다보면 이 기관이 많은 권력을 가졌고, 그 권력의 크기가 제도를 넘어 저작거리에서 커지면 커질수록 부패의 지대도 넓어졌고, 그 지대에서 많은 잘못이 있었으며, 여기에 대한 성찰이나 반성은 턱없이 부족했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로 인해 한국 사회와 시민들이 치러야 할 고통의 비용이 너무 컸다는 것도 느끼게 된다. 특히 이명박, 박근혜 정권 시절, 짖으라 하면 짖는 검찰 때문에 감내해야 했던 사회적 비용과 보통 사람들의 상처는 너무도 컸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과 동시에 검찰개혁에 속도를 낸 이유가 여기에 있을 거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한명숙 전 총리 수사 등 근거리에서 검찰이 휘두른 공권력의 피해를 온몸으로 경험했던 문재인 대통령에게 검찰개혁은 자신의 정권에서 반드시 풀어야 하는 숙제였던 거다.
문재인 정부의 검찰개혁은 준비 정도와 속도, 방법론에서 과거 노무현 정부 때와 확실하게 차이가 났다. 2017년 8월 법무부 첫 업무보고에서 “과감한 결단과 양보”라는 표현을 쓰며 개혁의 속도를 내라고 다그치고, 그렇게 발족한 법무부 산하 법무·검찰개혁위원회는 2017년 9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설치·운영 법안을 일사천리로 권고한다. 동시에 박상기 법무장관과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은 2018년 1월 검경 수사권 조정에 합의한다. 노무현 정부 때 검경 수사권 조정이 당사자들에 맡겼다가 서로간의 이해관계 충돌로 좌초되었다면 이번에는 청와대가 직접 주도하여 방안을 만들었다. ‘개혁 대상에 개혁을 맡기지 않는다’는 원칙을 적용한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수처 설치와 검경 수사권 조정 관련 법안은 곧바로 국회로 보내졌다. 그리고 지난 2019년 4월 여야 4당(더불어민주당과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이 두 법안을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으로 지정한다(한겨레, 2019, 8, 17).
과거사에 대한 청산도 이어졌다.
“김근태 전 의원 고문사건(1985년)”, “형제복지원 인권유린 사건(1986년)”,
“엄궁동 2인조 살인사건(낙동강변 2인조 살인사건, 1990년)”,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1991년)”,
“춘천 강간살해사건 : 파출소장 딸 살인사건(1997년)”, “삼례 나라슈퍼 살인누명 사건(1999년)”,
“약촌오거리 살인누명 사건(2000년)”, “PD수첩 사건(2008년)”, “정연주 KBS 사장 배임 사건(2008년)”,
“장자연 리스트(2009년)”, “용산지역철거사건 (2009년)”,
“청와대,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불법사찰 의혹 사건(2010년)”,
“유성기업 노조파괴 및 부당노동행위 사건(2011년)”,
“유우성 간첩조작 사건(2012년)”,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성접대 의혹 사건(2013년)”
이들 사건은 2017년 12월 설립된 '검찰 과거사 위원회'가 선정한 재조사 사건들이다. 민주화 이후 검찰은 다른 국가기관들과 달리 과거사 문제에 대한 조사와 사과를 완강히 거부해왔다. “우리에게는 오류가 없다. 우리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검찰 내부의 과도한 엘리트주의와 무오류 신화가 그 원인이었다. 고개를 숙이지 않던 검찰에 과거사위원회(법무부 산하)와 진상조사단(대검찰청 산하)이 설치되고, 대표적인 인권침해 사건들에 대한 조사와 검찰의 사과가 진행된 데에도 문재인 대통령의 의지가 크게 작용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 여름 검찰개혁의 제도적 완성을 위해 마지막 승부수를 던진다. ‘윤석열 검찰총장 임명’과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지명’이 그것이다. 지난 6개월 문재인 대통령도, 윤석열 검찰총장도 조국 법무부장관도, 한국 사회도 핫팩처럼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 예기치 않은 일이었고, 예상을 넘어서는 일이었고,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이며 무엇이 무엇인지 도저히 종잡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의 끝 무렵 조국 법무부 장관은 사퇴했고, 검찰 개혁의 공은 국회로 넘어갔다.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된 검찰개혁을 둘러싼 대서사시, 과연 2020년 그 중요한 매듭을 질 수 있을까? 모두가 국회를 주목하는 이유다.
<참고문헌>
딴지일보 (2019, 10, 11). 검찰청 사람들 2 : 역대 정권과 검찰과의 관계
문재인 ‧ 김인회 (2011). 검찰을 생각한다 : 권력검찰의 본질을 비판한다. 오월의 봄.
조선일보 (2010, 6, 10). 전국의 '검사 스폰서'들이 웃고 있다.
한겨레 (2019, 8, 17). ‘노무현의 탄식’에서 배운 문재인의 검찰개혁…국회가 고비.
법무부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