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개혁의 공은 국회로 넘어갔지만, 지난 6개월 조국을 둘러싼 뜨거운 정치적 논쟁은 한국의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관찰 지점인 것 같다. 사람들 앞에서 조국 사태와 관련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어떤 입장이 있는데 이야기하지 않은 게 아니라 처음에는 도대체 뭐가 뭔지 하나도 몰랐다. 하도 많은 이야기를 듣다보니 때론 희미한 윤곽이 잡히기도 했지만, 그때는 언론도 싫고, 검찰도 싫고, 조국도 싫었다.
친한 선후배들이 부지런히 촛불을 들고 토요일마다 서초로 여의도로 나갔는데 이상하게 나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음이 동하지 않는 거다. 그렇다고 광화문의 목소리에 공감할 일은 더욱 없었다. 무엇보다 “이게 내 문제”로 체감되지 않았다. 그러니깐 조국 대전에서 내가 동일시하며 응원하고 함께 울고 분노할 사람을 찾지 못했다.
“조국이든 누구든 그런 방식으로 공권력에 난타를 당해서는 안 되는 거지만” 그렇다고 “조국!!! 조국!!! 제발 버텨!! 힘내!!!”라는 말은 잘 나오지 않는 거다. 그러기엔 그가 사는 세계와 내가 사는 세계 사이엔 큰 간극이 있었다.
불편하기도 했다. 진보란 무엇인가? 소위 조국과 같은 (한때 내가 대단하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존경 비슷한 감정도 느꼈던) 강남좌파의 대명사들이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강남 밖 세상의 불평등과 박탈감을 강화시키는데 크게 일조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게 무슨 진보야? 강남좌파는 헛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상가성 여기서 보수에 밀리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답답해졌다. 기승전네편내편 가르는 이분법! 이제 지겨웠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아무리 위선적이고, 내가 아무리 공적 삶과 사적 삶이 다르고, 내가 아무리 권력욕망이 큰 강남좌파라 하더라도, 검찰의 공권력이 나와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까? 조국 가족과 관련한 수사는 배당, 수사방식, 피의사실공표 등에서 표적 과잉 편파 수사의 아주 나쁜 사례가 분명해 보였다.
조국을 비판하는 진영의 선봉장에 선 사람들이 과도하게 극단적이고, 편파적이며, 조국은 100% 나쁘고, 자신은 100% 선하다는 확신에 찬 언어도 마음이 불편했다. 광화문에 울리는 목소리는 과도하게 과격했다. 저런 언어를 듣는 아이들은 과연 어른들을 제정신으로 볼까, 부끄럽기도 했고, 저런 걸 배우는 아이들이 훗날 어떤 모습이 될까, 두렵기도 했다.
“야! 까보면 니가 더 나쁜 새끼잖아. 제발 좀 거울 좀 보고 나부터 성찰 좀 하자!”
이런 한숨과 욕이 나오는 거였다.
여기저기서 독설과 욕설을 앞세운 미디어들과 사람들이 전쟁의 전면에 서는 것도 불편했다. 조국 사태가 진보와 보수의 전쟁이 되는 순간,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전략적 차원에서 상대가 100% 나쁘다고 진심으로 믿는 게 필요한 것 같다. 난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그런 언어들이 영 피곤하다. 좋은 놈도 49%는 나쁜 놈이고, 나쁜 놈도 49%는 좋은 놈이다. 세상에 100%란 없는 것 아닐까? 그런 세상은 베르나르베르나르 소설의 <신>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다.
대학원 시절 민주주의의 역사를 배우면서 하버마스의 공론장 모델에 매력을 느낀 적이 있었다. 책은 두터웠고, 하버마스의 문장은 쉽게 끝나지도 쉽게 이해되지도 않았지만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하는 이상적 모델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그런 희망 따위가 참 허망하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래도 중요한 갈등 이슈에 있어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숙의되고 토론되고 중재되는 과정은 필수적이다. 문제는 검찰개혁과 관련하여 공론장이 마련되기 위해서는 전쟁터에서 100% 나쁜 놈이라 낙인찍었던 놈도 공론의 테이블에서는 그 기운을 51% 정도로 톤다운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이게 조국대전을 치르는 광장을 넘어 평상시 우리가 사는 진짜 세계의 모습이기도 하고, 그래야만 소위 대화라는 게 가능하다. 이 대화를 위해서는 자신이 확신하는 이념 체제에서 일정부분 탈출하는 용기, 자신이 전쟁에서 썼던 과격한 수사와 과장된 언어를 폐기처분 하는 용기도 필요한데, 흘러가는 분위기는 소수의 용기를 가진 사람도 독설과 욕설이 난무하는 분위기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처럼 느껴졌다. 이게 영 불편했다.
“그런데 이렇게도 생각할 수도 있지 않나요?”
이런 소수 의견을 피력했다간 바로 배신자의 낙인이 찍히는 분위기가 참 싫었다.
어쨌든 시간은 흘렀고, 조국은 사퇴했으며, “조국 대전”의 결론은 또 시간이 한참 지난 뒤 검찰의 공소장과 법원의 판결문으로 결론이 날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과정이 우리 사회에 아주 안 좋은 시간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그러기를 바란다). 그러니깐, 제대로 된 학습과정은 되었을 거다. 공공영역에서 무언가를 해보려는 욕망을 가진 친구들에게 조국이라는 하나의 언표가 중요한 각인효과가 되지 않았을까?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법적으로 문제가 있어서도 안 되고, 주변의 잘못된 습관과 관행을 묵인해서도 안 되고, 무관심해서도 안되는 거구나. 예민하게 나를 돌아보고, 티끌 하나라도 묻은 게 있으면 털어내려 늘 예민하게 반응해야 하는구나. 이런 식으로 지금 이 시간이 후대의 대통령,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들에게 선용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조국 사태, 박근혜 대통령 탄핵 등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방향들이 최종적으로 사법부의 결정에 의해 좌우된다는 생각이 들면서 사법개혁, 좀 더 좁게 보면 검찰개혁이 정말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도 들었다. 386세대가 대학생이었던 1980년대는 군인의 시대였다. 이때는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고, 텔레비전에도 가장 많이 보이고, 볼 때마다 분노하게 되는 적이 명확한 시대였다.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싸워야 할 대상과 목표도 분명했다.
내가 대학생이던 1990년대는 (적어도 내게는) 언론의 시대였다. 언론은 대통령을 만들 수도 있고, 기업을 무너뜨릴 수도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언론의 칭찬을 좋아하며 늘 사진기자와 카메라 기자를 찾았고, 그만큼 언론인들의 어깨 뽕은 높아졌으며, 1996년 신방과에 들어간 나는 그해 여름 연대 사태(제 6차 8.15 통일대축전 행사)를 근저에서 경험하면서 언론의 위력을 경험했다. 조선일보와 KBS를 필두로 당시의 언론은 대학생들을 화염병으로 무장한 ‘북의 직계부대’이자 ‘조선노동당 재남 행동대원’이라고 규정되기 바빴다. 정치권력과 공생하던 언론은 1997년 대선에서 권력 창출에 직접 나서기도 했고, 여론조작, 언론의 상업화와 부패, 언론의 권력화 등이 사회적 이슈로 자주 부각되곤 했다. 당시 나는 가장 중요한 시대의 화두는 언론개혁이라 생각했고, 그만큼 언론의 힘은 과도하게 셌다. 언론학자 강준만 선생님을 시작으로 안티조선일보 운동이 들불처럼 번졌고, 이때 역시 1980년대만큼 개혁해야 할 대상과 목표는 분명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19년, 한국의 권력은 대통령도, 국회도, 언론도 아니라 법원, 검찰, 로펌을 포괄하는 법조계 신성가족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치, 경제, 언론계를 넘나들며 고소, 고발이 판을 치고, 결국 모든 논쟁과 사건과 갈등의 최종 판단지는 법조계로 수렴된다. 그리고 그 법조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집단이 바로 검찰이다. 그 검찰로부터 수많은 비리가 동어반복적으로 터지고, 인권침해의 사건 역시 계속된다면? 1980년대 민주화가 필요했던 것처럼, 1990년대 언론 개혁이 필요했던 것처럼 2019년 검찰 개혁이 필요한 이유일 거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 검찰개혁과 내 일상 사이에 너무 큰 간극이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프롤로그에서도 언급했지만 “검찰을 개혁해야 한다.” 이 당위적 문장에 대해 한편으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 그래?”라는 물음표가 붙는 거다. 단적으로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공수처 설치 문제, 그건 돈 있고 힘있는 사람들 이야기지, 이게 돈도 없고 백도 없는 나랑 무슨 상관이야?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조정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내 삶과 큰 상관이 없어 보인다. 검찰이 하든 경찰이 하든 뭔 상관이야? 그냥 권력기관끼리 기싸움 아니야?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 거다.
사실 검찰과 관련된 이야기를 모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스스로 이 삐딱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위함이었다. 그래서 찾았냐구? 거칠게라도 찾은 것 같다.
그걸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공권력에 대한 공포심?. 지금과 같이 수사, 공소, 구속영장 청구, 형집행 등 형사소송과 관련한 모든 권한과 힘이 검찰에 집중되어 있는 구조 속에서 이상한 검찰 한 명이 내 삶을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것은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정치권력이나 경제권력에 린치를 당해 고소를 했는데, 이 사건을 맡은 검사가 그들과 끈적하게 연결된 비리검사이고, 이 비리검사를 검찰이 조직논리로 옹호하고 있다면, 난 도대체 어디에 내 억울함을 호소해야 하나, 이런 생각도 들었다. 한마디로 검찰개혁은 그들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살아갈 세상을 위해, 민주주의라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저작거리의 평화와 자유를 위해 필요한 거다.
문제는 어떻게!!! 또 하나의 문제는 그게 과연 가능할까!!!!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이 질문에 답하려면 누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어봐야 하나?
검찰, 변호사, 판사들이 쓴 이야기, 이들과 관련된 드라마, 영화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검찰의 오늘이 조금은 구체적인 실상으로 잡히기 시작했다. 다음 장부터는 이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