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이 시작되자 죽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 개들이 돌아다니고 있었고, 낯선 꿈속의 공주들이 산책을 나왔다. 공주들은 자유로웠고 그 어떤 구속도 없었으며 영원했다. (Fernando Pessoa, 1999/2014, p. 53)
눈을 뜬다. 여긴 어디? 사방을 돌아본다. 곳곳에 루시아의 얼굴과 목소리가 묻어있다. 오늘은 드디어 루시아가 운영하는 사감 숙소에서 출소하는 날이다. 아~ 신나라. 살금살금, 조심조심, 루시아 아줌마가 깰까봐 조심조심 화장실과 부엌을 오간다. 루시아가 만지지 못하게 한 차양벽을 둘둘 말아 발코니 밖으로 던져버리고, 욕조에서 물장구를 쳐 화장실을 물바다로 만들고, 루시아 집을 더러운 운동화로 구석구석 꾹꾹 밟아내고 싶은 상쾌한 아침이다. 간단히 세수와 양치질을 하고 짐을 싸고 조용히 방을 나오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가 등장한다. 옆 방의 문이 열리고 루시아 아주머니가 잠에서 덜 깬 모습으로 우리에게 굿바이 키스라도 할 기세로 기분 좋은 봄디아를 외치는 거다.
“봄디아~~ 잘 잤어?”
“네. 저희 이제 가려구요. 잘 쉬다 갑니다.”
“나도 반가웠어. 너희가 내 집에서 규칙도 잘 지키고, 방도, 화장실도 깨끗하게 사용해서 얼마나 이쁜지 몰라. 오늘은 어디로 가니?”
“신트라로요.”
“아~ 신트라. 조용한 동네야. 거기서 오늘 묵는 거야? 거긴 대부분 휘리릭 오후에 반나절 갔다 휘리릭 돌아오는 곳인데..”
“네 거기서 이틀 정도 머물려고 해요.”
“(신기한 듯, 이해가 안가는 듯 쳐다보다) 거기 가면 무어성이 있어. 밤에 무어 성을 보면 뭔가 마법에 걸려 동화 속에 들어선 기분이 들거야.”
“(저희는 여기서도 그랬어요. 마귀 할머니의 마술에 걸린 느낌이었거든요)”
이 말은 하지 못하고, 짐을 들고 문을 나서며 다시는 삶에서 마주하지 않게 될 루시아를 처음으로 자세히 바라본다. 후미진 마을에서 자신의 성을 지켜가는 성지기의 단호함, 피곤함, 주름진 세월이 묻어있는 표정이었다. 짧은 포옹을 했고, 앞으로도 루시아 아주머니가 자신의 성을 잘 지켜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언제나 내 삶은 현실의 조건 때문에 위축되어 있다. 나를 얽매는 제약을 해결하려 하면 같은 종류의 새로운 제약이 나를 결박해버리는 상태다. .. 나는 조심스럽게 밧줄을 벗겨본다. 그리고 내 손으로 내 목을 움켜쥐고는 나를 교살한다. (같은 책, p. 54)”
때론 성벽을 단단히 세우고, 나의 성을 지키는 것이 나를 얽매는 제약이 되기도 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에게 이건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 나와 주변을 얽매는 밧줄이 마지막 자존심이기도 한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난 2박 3일 동안 루시아의 자존심을 지켜준 것은 잘한 일인 것 같다. 그녀의 표정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린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역할을 해야하는 것 아닐까? 그게 아주 어려운 일이 아니라면 말이다.
어쨌든 엄격하고 조용했던 루시아의 집을 떠나 버스를 기다린다. 기차를 기다린다. 그렇게 신트라로 향한다. 기차는 리스보아 중심지를 떠나 신트라로 향한다. 우리로 치자면 청량리에서 경춘선을 타고 경기도 양평과 강촌을 지나 춘천으로 가는 길 정도 되겠다. 신트라는 숲이 울창하고 따뜻하다. 내 상상력의 미천함 속에서 그 울창함은 고작 오즈의 마법사나 빨간머리 앤 정도가 떠오른다. 사실 신트라의 매혹은 그 이상이다.
신트라역에 도착해 에어비앤비의 새로운 호스트를 만나기 위해 약속장소까지 약 30분을 걸어야했다. 수백 년은 그 자리에 있었을 것 같은 가로수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드르륵드르륵 커리어와 함께 걷는다. 길 양 옆에는 아기자기한 그릇, 공예품을 파는 페드로 코스타와 주아옹 니콜라우가 인심 좋은 표정으로 우리를 보며 작업을 하는 중이다. 오솔길의 예술가들은 인간에게 어울리는 유일한 행위는 무익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양, 대부분은 무심하게 지나가는 거리에 터를 잡고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할 작품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게 삶의 수행이자, 행복이라도 되는 것처럼... 오솔길은 무익하다고 생각하는 작품에 매달리는 예술가들, 비밀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사람들, 어젯밤 꿈속의 형상을 그려내는 사람들이 마법의 강물처럼 흘러 내려간다. 그 강물의 끝에 신트라 궁전이 있다.
오늘 묵게 되는 에어비앤비의 주인장 아저씨는 루시아 아주머니와 반대로 그리스 인 조르바를 닮았다. 조르바의 모습을 하고 골동품 가게를 운영한다. 그를 만난 오후 2시, 태양은 따뜻했고, 그가 내민 두터운 손은 더 따뜻했다.
"오~ 마이 브러더~~ 오래 기다렸나? 난 오늘도 점심에 한잔 했어. 어떻게 이렇게 화창한 날 안마실수가 있냐구?'
그가 끌고 간 작은 집, 아기자기하고 깔끔하며 무엇보다 조용하고 자유로웠다. 점심부터 한 잔 하는 멋진 조르바에게 규율 따위는 없는 거다. 짐을 풀고 나와 신트라 궁전 앞 레스토랑에서 늦은 점심을 먹는다. 조금은 럭셔리한 노천 레스토랑에서 맥주 한 잔과 함께 하는 점심이었다. 그리고 오후에는 조르바가 꼭 가봐야 한다고 강추한 헤갈레이라 별장이라는 데를 다녀왔다.
헤갈레이아 별장.
매일 점심 와인 한 병씩은 마셨을 법한 괴짜 부자가 성을 샀고, 그 성을 별장으로 꾸미기 시작해서 만들어진 공간이란다. 거기에는 흥미로운 동굴이 있고, 우물이 있다. 조금은 무서운 수족관이 있고 - 거기에 과연 물고기가 살지 괴기스러운 - 녹조 라떼에 가까운 연못이 있다. 리스보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가 곳곳에 펼쳐져 있고, 짙은 녹음과 형형색색의 이름 모를 꽃들을 자랑하는 정원이 있다.
이곳에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이야기는 없지만, 한 괴짜 인간이 만들어낸 세계의 독특함이 있다. 생각해보면 포르투갈의 명소는 그런 괴짜 인간들이 만들어낸 세계라는 생각도 든다. 굴벤스키 미술관도 그렇고, 헤갈레이아 별장도 그렇다. 그러니깐 이 투박한 세상의 점점의 매력은 괴짜들로부터 오는 거다. 생각해보면 파두가 세계에 알려진 것도 한 사람부터이며,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향해도 그런 괴짜들로부터 시작된 거다. 포르투갈의 다채로움은 바로 거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아닐까? 괴짜들의 점점이 모인 공간, 배우고 싶은 수많은 점.점.점.
저녁 8시, 신트라 궁전 앞 한 노천카페에 앉아 있다. 저녁 무렵 신트라는 조용하고 시원하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한적한 신트라 거리에 어둠이 조금씩 찾아온다. 더블 에스프레소를 주문한다. 달콤한 타르트에 멋들어지게 에스프레소 커피를 곁들이고자 한 것은 아니고, 더블 에스프레소라는 포르투갈 언어 사이에 비친 익숙한 영어를 보고, ‘아 더블이면 스타벅스에서 아메리카노 숏사이즈 정도 되는 거겠군.’하는 아주 이상하고도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정말 바보였다. 한 모금을 마시고, 너무 써서 퇘퇘퇘 침을 다발총으로 난사할 뻔했다.
“아저씨 설탕 좀 주세요.”
커피는 씁쓸했지만, 해질녁 신트라 풍경은 기막히게 청량하고 평화롭다. 옆자리에서 그녀는 열심히 뭔가를 메모하고 있고, 그 옆에서 흑인 언니는 크레페를 만드는 중이다. 웨이터들은 오후의 손님들이 지나간 자리를 정리 중이고, 신트라 궁전 광장은 싸니카, 바브나, 마히따, 라쉬미카로 불릴 것으로 추정되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지 오래다. 신트라 궁전은 8세기 무렵 아프리카에서 넘어온 무어인이 이용했다고 하는데 왠지 무굴 제국에서도 잘 어울렸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노천카페에는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 맥주와 와인을 마시고 있고, 그렇게 신트라의 조용하고 청붉은 여름 날의 오후가 지고 있다.
여름이지만 웬걸, 여기 카페엔 커다란 난로에 불이 들어와 있다. 구글 웨더에서 가리키는 숫자는 18도다. 수영복을 이곳에서 꺼낼 날이 있을지 의문이 드는 서늘함이다. 해가 지고 한참을 그곳에 앉아 있다 숙소로 돌아와 와인 한 병을 마신다. 그렇게 하루가 지난다. 창문 사이로 신트라의 여름 바람이 시원하게 들어온다.
“신기해. 이제 안가려워.”
오늘자로 그녀를 이번 여름 내내 괴롭히던 가려움증이 사라졌다. 스트레스가 원인이라 볼 수밖에 없는 그녀의 가려움증이 사라진 새벽, 나는 삶이란, 건강한 삶이란 생각하지 않는 것, 기억하지 않는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생각하지 않기 위해 짐을 싼다. 낯선 곳을 걷는다. 머문다. 쓴다. 다시 걷는다.
여행과 메모는 기억과 생각에 얽매여있는 나를 해방시키는 가장 좋은 방식이라 생각한다.
안녕. 신트라에서의 첫날 새벽.
<참고문헌>
Pessoa, F. (1999). The Book of Disquiet. 배수아(2014). 불안의 서. 통영: 봄날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