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대부분 우리 자신의 바깥에서 산다. 삶이란 지속되는 산란이다. 그러나 삶은 우리를 우리 자신이라는 중심으로 끌어당긴다. (Fernando Pessoa, 1999/2014, p. 383)
시계처럼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매일 동어반복처럼 보이는 일상을 살아가는 두 명의 패터슨이 있다. 복장도 동선도 비슷했지만 한명은 행복으로 충만했고, 또 다른 한명은 불만으로 충만했다. 패터슨의 직업은 버스 운전사. 신트라를 출발하여 카스카이스로 갈 때 마주한 패터슨의 미소는 여유롭다. 유쾌하다. 버스에서 만난 동네 어르신들, 꼬맹이들과 “봄디야”에서 시작하여 신나게 수다를 떨며 길 위를 운전해간다. 그가 웃는다면, 그건 그가 정말로 행복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지만, 꼬불꼬불 시골 산골을 넘어가면서 버스 승객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귀동냥하며 추임새를 넣는 그 순간 행복은 단연코 그에게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반면 카스카이스에서 신트라로 돌아올 때 마주한 패터슨은 뼛속까지 초라하고 무료한 표정이었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도로 위에서 마주하는 일상의 끈적이는 반복에 대해 ‘이번 생은 글렀어’같은 표정으로 운전대를 지켰다.
“어이 동양친구, 네 버스티켓 인식이 안돼.”
“왜 그럴까? 아침에 신트라역에서 산 티켓이야.”
“왜 안되는지 난 알바 없고, 현금으로 내. 9유로야.”
“아니 티켓이 인식 안된다고 돈을 또 내라는 건 어느 나라 법이야? 니 마음이야?”
“돈 내기 싫으면, 내려.”
“내리긴 왜 내려 친구. 이건 내 잘못이 아니잖아. 너희 회사 시스템의 문제지. 자 봐, 이 티켓, 너희가 만든 것 아냐?”
“그럼 이게 내 잘못이야? 내리라니깐..”
이 싸움을 쫑낸 것은 그녀였다. 그녀는 자신의 티겟을 흔들면서 대략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어이 패터슨, 당신 지금 뭐하는 거야? 우리 부부야. 아침에 같이 티켓을 샀어. 내 티켓은 인식이 되고, 남편 티켓은 인식이 안돼.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 어디에 문제가 있는 거야? 너희 시스템 문제인데, 우리가 피해를 봐야되는 거야? 남편은 내리고, 나는 이 버스를 타고 가야돼? 이게 무슨 개똥같은 소리야?”
내용보다 그녀의 카리스마에 주눅이 들었는지 패터슨의 투덜거림이 멈췄다. 우리는 그렇게 패터슨이 운전하는 투덜이 버스를 타고 신트라로 돌아왔다. 신트라에 도착하니 어제 만난 코스타와 니콜라우가 하루 작업을 마치면서 오솔길의 갤러리를 폐장하고 있었다.
“어디 다녀와?”
“카스카이스에 다녀왔어.”
“익숙하면서도 아름다운 곳이지.”
“맞어. 익숙하면서도 평화로운 곳이었어.”
“오늘이 신트라에서 마지막 밤인가?”
“응, 마지막 밤이야.”
“해질녘 풍경이 기막히게 아름다울 것 같은 날씨야. 다시 오지 않을 이 조그만 귀퉁이를 잘 느끼고 가라구.”
분명 평화로운 풍경인데 문득 문득 무료한 일상에 찌든 버스운전사의 얼굴, 찡그린 패터슨의 얼굴이 떠올랐다. 인간의 삶은 자주 관계와 사물에 휘둘린다. 좋은 패터슨을 만나면 나도 좋은 사람이 되는 기분을 가지게 되고, 나쁜 패터슨을 만나면 나 역시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다. 어떻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일상에서 어떤 얼굴일까? 그냥 이런 저런 생각과 질문이 떠오른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외운다.
"생각하지마. 생각하지마. 생각하지마."
"질문하지마. 질문하지마. 질문하지마."
신트라는 묘하게도 세상의 흐름과 속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은둔자들, 순교자들, 예술가들이 사는 동네 같다.
코스타와 니콜라우가 오솔길에 마련한 아트 갤러리를 스쳐지나가면서,
화이트 와인에 취해 궁전 앞에서 춤을 추는 조르바를 떠올리면서,
푸른 숲과 시간이 정지한 듯한 오솔길을 한 발 한 발 밟아가면서
이 세상 곳곳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인상을 찡그린 채 게임을 거는 패터슨들에 휘말리지 말자고,
신트라 곳곳에 새겨진 순교자의 마음, 예술가의 마음, 조르바의 마음을 흘려보내지 말자고 속삭여본다.
신트라에서의 마지막 밤, 한참을 담요를 두룬 채 신트라 궁전 앞 벤치에 앉아 있었고, 한참동안 창문을 열어 놓은 채 적막한 시간에 몸을 맡긴다. 단조롭고 고요한 삶. 존재가 단조로워지지 않도록 삶을 단조롭게 형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작은 파동, 바람, 움직임, 사건이 파문을 일으킬 수 있도록 일상을 고요하게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을 가져본다. 무어인이 살았다는 성을 바라보면서 꿈속에서 그리던 움직이는 성들의 이미지, 다른 시대에 열렸던 성의 축제, 다른 자연의 풍경, 다른 감정들을 상상한다. 이 상상만으로 어제와 다른 내가 빚어진다는 생각을 한다. 오늘 만났던 패터슨을 떠올려본다. 호카곶과 카스카이스를 떠올려본다. 오솔길을 기억해내고 그곳에 매일 동일한 시간에 출연하는 예술가를 기억해본다. 높은 언덕들, 오래된 건축물을 붙잡아 만들어진 오솔길, 비탈들, 계단 모양으로 쌓여 뭉쳐 있는 갖가지 색의 건물들, 궁전 앞 춤을 추고 싶은 광장, 보라색으로 물들어가던 파란 하늘, 이 모든 게 지금의 나다. 그리고 지금 난 창문을 열어 놓고 와인을 홀짝 거리고 있다.
오늘의 나를, 오늘의 너를 사랑하기 딱 좋은 저녁이다.
<참고문헌>
Pessoa, F. (1999). The Book of Disquiet. 배수아(2014). 불안의 서. 통영: 봄날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