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 끝까지 간다 프로젝트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그 길을 방해하는 장벽들이 있다. 구약성서를 끝까지 읽으리라는 목표로 길을 떠날 때 마주하는 첫 번째 장벽, 바로 레위기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로 시작하는 창세기는 “처음"과 "창조"라는 기운이 제법 어울려 어렵지 않게 매듭 질 수 있었다. 작심삼일의 기운이 적어도 창세기가 끝날 때까지는 지속될 수 있는 거다. 그 다음에 펼쳐지는 출애굽기는 “자 떠나자 광야로~~”, 이른바 스펙타클한 어드벤처 스토리여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라~ 성경이 재미있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출애굽기가 끝난다. 그런데 갑자기 레위기에 오면 “아 내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가?”, “이것이 성경인가, 시련인가?” 이 마음과 싸우게 된다.
“제사장은 그 날짐승을 받아서 제단으로 가져가고, 그 목을 비틀어서 머리를 자르고, 그 머리는 제단에 불사르고, 피는 제단 곁으로 흘려야 한다... (레위기 1장 15-17)”
“화목제물 가운데서 기름기, 꼬리 전부와 내장 전체를 덮고 있는 기름기와 내장 각 부분에 붙어 있는 기름기와 콩팥과 허리께의 기름기와 간을 덮고 있는 껍질을 나 주에게 살라 바치는 제물로 가져 와야 한다. 너희는 어떤 기름기도 어떤 피도 먹어서는 안 된다.... (레위기 3장 10-17)”
이런 걸 한자 한자 꼼꼼하게 읽다보면 여기는 어디이고, 나는 누구인지 혼란에 빠지게 된다. 당장 책을 덮어버리고 싶다는 유혹에 빠진다. 수천년 전 서 수많은 제사 의례에 대한 이야기를 목도하다보면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검지 손가락의 움직임이 분주해진다. 페이지 넘어가는 속도가 거의 LTE급으로 빨라지게 되는데 그러다 어느 대목에서는 잠깐 브레이크를 밟기도 한다. 가령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언덕에서...
“밭에서 난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에는 밭 구석구석까지 다 거두어들여서는 안 된다. 거두어들인 다음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도 안 된다. 포도를 딸 때에는 모조리 따서는 안 된다. 포도밭에 떨어진 포도도 주워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 신세인 외국 사람들이 줍게 그것들을 남겨 두어야 한다.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레위기 19장 9-10)”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남을 헐뜯는 말을 퍼뜨리고 다녀서는 안 된다. 너는 또 네 이웃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이익을 보려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주다. (레위기 19장 16절)”
“한 백성끼리 앙심을 품거나 원수 갚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다만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나는 주다. (레위기 19장 18절)”
“백발이 성성한 어른이 들어오면 일어서고 나이 든 어른을 보면 그를 공경하여라. 너희의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 나는 주다. (레위기 19장 32절)”
“나는 주다.” “나는 주다” 이 말이 강력하게 들린다. 책을 던져버리고 싶다는 강렬한 유혹을 불러일으키는 수많은 규례, 이 규례와 규례 사이에 견고하게 흐르는 삶의 지침들, 그리고 중간 중간 지루해질 때즈음 렐리지오소(religioso, 경건하게 연주하라) 악상기호의 역할을 하는 “나는 주다.”
“나는 주다”를 중심으로 레위기에 흐르는 리듬을 따라가다 보면, 올드테스타먼트가 향하는 이야기는 인간의 마음 안으로 수렴하는 게 아니라 마음 밖으로 확장된다는 걸 체험하게 된다. 드라마로 치자면 기원전 약 1,000년 애굽 땅을 무대로 신과 인간이 펼치는 버라이어티한 액션어드벤처 무비라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이 액션어드벤처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액션이지 관념, 추상, 형이상학 따위가 아니다. 애초 추상 따위에는 관심을 두기 어려운 시대였고, 모든 플롯은 생각의 변화가 아니라 행동의 변화를 따라간다. 어떻게 행동하느냐, 어떻게 행동을 바꾸느냐, 이게 종교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2020년 오늘을 살아가는 한 생명이 3000년 전의 액션어드벤처를 바라볼 때 낯설고 이질적으로 느끼는 부분이 두텁게 쌓일 수밖에 없는 거다. 행동의 룰, 행동의 배경, 행동의 공간이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이 낯섦 속에서도 느낄 수 있는 단 하나의 정서가 있다면 그건 바로 거룩함이었다.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 (레위기 19장 2절)”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 이 문장을 뚫어지게 보다보면 나도 모르게 표정이 근엄해 지고,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그래 거룩하자!” “거룩해야 하는 거야!” “거룩하자” “거룩?” “거룩...” “거룩은 무슨...”
어떻게 거룩해질 수 있단 말인가? 거룩이란 뭐냔 말이다. 어깨에 힘을 빼고 다시 레위기 안으로 들어가보면 거기에 새겨진 거룩의 메시지는 생각보다 평이했다. 노란 옷을 입은 일곱 살 꼬맹이가 유치원에서 들었을 법한 이야기들이라고 할까?.
“튤립반 친구들!! 가난한 친구들을 위해 모든 먹을 것을 다 자기 것으로 취하면 돼요 안돼요? 안돼요~”
“해바라기반 친구들!! 이웃을 어떻게 해야 한다구요?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하는 거에요.”,
“개나리반 친구들!! 나이든 어른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한다구요? 공경하라구요.” ,
“개구리반 친구들!! 친구들끼리 서로 헐뜯으면 될까요? 안될까요? 안돼요.”
정말 이게 다야? 이게 거룩함이야? 그렇다면 정말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다 배운 거야? 가만 있어봐라. 그런데 구약을 넘어 많은 위대한 이야기들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방향은 이와 무관하기 어려운 것 아닌가? 가령 내가 너무도 애정하는 <나의 아저씨> 이웃에 대한 이야기잖아. <눈이 부시게> 나이듦에 대한 이야기잖아. <마인> 다 내꺼야라고 외치는 욕망에 대한 이야기잖아. <빈센조> 우정에 대한 이야기잖아.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으면서 거룩함을 생각하다보면 대부분의 위대한 이야기, 그 안에는 평이하기에 거룩한 메시지가 담겨 있음을 새삼 느끼게된다.
그리고 궁극에는 이런 질문, 이런 의구심과 마주하게 된다.
“이야기 밖 현실, 어디 이게 쉬워? 쉽냐구”
“다 내 능력으로 가진 건데 이걸 왜 나눠야 하는 거죠? 이건 제 피땀눈물로 맺어진 결실이에요, 양보할 수 없어요. 나눌 수 없어요.”
“어른들을 공경하라구요? 어디 공경할만한 어른이 있나요? 먼저 그들이 공경 받을만한 행동을 해야죠. 그러지도 않으면 공경하라는 건 불공평해요.”
“헐뜯을 일도, 사람도 천지인데 어떻게 헐뜯지 않고 살 수가 있죠?”
“이웃을 사랑하라뇨?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구약성서 레위기를 펼치고, 그 안에 기록된 행동지침들, 거룩함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들과 내 일상의 행동을 하나하나 비교하다보면 젠장~ 이 유치원 튤립반에서 배운 이야기들이 하나도 쉽지 않은 거다. 그래서일까? 3000년 전의 사람들도 이 쉽지 않음을 인정하여 매일매일 의식적인 노력과 훈련이 필요했고, 의례가 필요했고 바로 그 차원에서 레위기라는 삶의 지침서가 기록된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같은 맥락에서 2020년판 나만의 레위기를 만들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거룩한 삶을 추동할 일상적 의례들과 룰들을 만들어가는 거다. 어쩌면 그게 “여긴 어디? 나는 누구?”라는 감정을 오가며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등등 수많은 의례를 따라가면서 힘겹게 레위기를 끝내며 건져내야 하는 한가지인지도 모르겠다.
가만 있어봐라. 이 새로쓰는 레위기를 뭐라고 부를까나?
거룩함의 선율, 레위기. 렐리지오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