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버스에서 마주친 동창
5년이 지난 우연한 만남
버스 맨 뒷자리에 빈석이 있었다. 항상 만석이라 서서 가는 날이 많았는데. 그날은 운이 정말 좋은 날이었다. 빈 좌석을 발견하자마자 쏜살같이 빠른 속도로 향했다. 눈은 빈 좌석에 고정한 채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버스를 가로질렀다. 다른 이가 앉기도 전에 재빠르게 비어있는 자리를 차지했다. 적당한 쿠션감이 느껴지자 안도감이 들었다. 앉아서 출근할 수 있어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시작이 좋은 하루였다.
장차 한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출근길이다. 심지어 곧지 않은 길이라 아침부터 힘을 써야 하는 일이 많았다. 손잡이 하나를 겨우 잡고 급커브 하는 버스에서 중심을 잡아야 했다. 손잡이를 움켜쥔 손이 얼얼할 정도로 꽉 쥐었다. 몸이 무너지지 않고자 발을 조금씩 움직이며 중심을 잡았다. 한 손에는 도시락을 담은 주머니까지 들고 있으니 더욱 조심해야 했다. 자칫 하다 너무 흔들리면 도시락 안에 담긴 음식이 넘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버스 문이 열릴 때면 빈 좌석이 있기를 바랐다.
한 정류장에 버스가 멈춰 서자 몇몇의 사람들이 올라탔다. 어수선해진 버스 상황 때문에 핸드폰에 향하던 집중이 흐트러졌다. 고개를 올렸다가 깜짝 놀랐다. 버스 뒷좌석 쪽으로 다가오는 한 여성의 얼굴이 낯익었다. 입고 있는 옷이 교복이 아니라는 점만 다를 뿐. 앞머리 없는 긴 생머리와 동그란 눈은 내가 알던 모습과 동일했다.
학창 시절 많은 추억을 나눴던 N이었다. N은 비어있는 뒷 공간으로 들어오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움찔. 짧은 시선이 스치다가 우리는 서로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다시 화면으로 돌아왔지만 내 신경은 온통 N에게 가 있었다. 그녀는 나와 멀지 않은 곳에서 손잡이를 잡고 창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연히 N을 마주치자 부끄러움이 서서히 몰려왔다. 꾀죄죄한 출근길의 내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퉁퉁 부은 두 눈과 화장끼 없는 맨 얼굴, 급한 마음에 대충 집어 입은 옷. 5년 만에 마주친 친구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마주친다면 멋진 모습이기를 바랐건만, 현실은 이다지도 다르다.
내가 상상하던 재회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굵은 결을 준 윤기 난 머릿결에 깔끔하게 차려입은 셔츠와 치마를 입은 모습이어야 했다. 점심값을 아끼기 위해 도시락을 들고 있거나, 파마한 지 오래되어 머리가 부스스하거나, 굽이 있는 구두가 아닌 편한 운동화를 신는 모습은 바라던 상상과는 달랐다. 반면에 N의 긴 머리는 여전히 찰랑거렸고 청자켓과 청치마를 입었다. 아무나 소화 못하는 청청패션이라니. 적어도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면 저런 모습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초라해지고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더욱 나를 비참하게 만든 것은 우리가 짧은 고갯짓으로도 인사를 나누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연스레 연락이 뜸해진 우리. 대학을 진학하면서 흩어졌고, 우리는 더 이상 한 공간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지 못했다. 통화 버튼을 누르면 전화할 수 있는 연락처가 있건만. 무엇이 그리 바빴는지 나는 N을 새까맣게 잊고 지냈다.
사실 바쁘다는 핑계보다 연락하기 두려웠다는 것이 맞을 듯하다. 고등학생 3학년이 되자 학업에 시달렸던 나는 친구와의 관계가 소원했다. 그러니 N과 점점 서먹한 사이가 되었다. 중학생 때부터 이어졌던 N과의 관계는 끝을 향하고 있었다. 터놓고 마음을 전할만한 용기도 없었다. 그렇게 흐지므지 졸업을 맞이했고 우리는 우연히 마주쳐도 인사도 못하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스쳐 지나가는 순간에도 나는 N을 부를 수가 없었다. 우리의 관계를 내가 망쳤다는 죄책감에 염치없이 인사를 건넬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아는 척해봤자 무엇한가 싶었다. 그저 못 본 척하며 버스를 내렸다. N이 나를 알아봤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고등학교 친구의 말을 통해서였다. 진주야, N이 너를 버스 안에서 봤다던데. 그 말에 당혹스러웠지만 애써 감정을 감췄다. 나도 본 것 같아, 라는 말로 간단히 답했다. 더 이상 그날에 관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혹시 나를 봐서 반가웠는지, 인사를 안 한 나에게 실망했는지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 뒤로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버스를 탔지만 더는 N과 마주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