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뼘 열린 방문 사이에서 빛이 스며들어온다. 아침해가 온전히 기지개를 켜기 전에 피어나는 빛이 컴컴한 집안을 조용히 깨우고 있다. 그 빛은 문틈에서 고개를 내밀어 짙은 어스름 구석까지 다다른다. 미온한 새벽녘을 온기로 채우는 그 빛은 부엌에서 시작되었다. 창밖으로 아침놀이 어른거리고 찬 새벽 공기가 공간을 무겁게 누르고 있다. 부엌에서 일렁이는 소음이 조금씩 단잠을 깨웠다. 눈을 뜨고 가만히 숨을 고르면 살며시 다가오는 소리가 선명해진다. 냉장고 문을 여는 소리, 안에서 무언가 꺼내는 소리, 반찬통 뚜껑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사부작거리는 소리를 따라가면 온전히 다 켜지 못한 부엌불이 보인다. 반쯤만 켜둔 불빛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거실까지 다가갔다. 짙은 새벽어둠 속에 숨은 거실의 사물들이 마지못해 제모습을 드러낸다.
부엌에 다다르자 인기척이 더 크게 들려왔다. 부엌불이 한편에 서 있는 엄마의 뒷모습을 비춘다. 방금 일어난 듯 제대로 묶지 못해 삐죽 잔머리가 삐져나온 부스스한 엄마의 뒷머리가 보인다. 다가가면 이불에 푹 싸인 단잠의 포근함이 맡아질 듯하다. 아마 오전에 별일이 없다면 엄마는 그대로 빠져나온 이불 속으로 들어갈 테지. 애써 정리하지 못한 차림과 달리 움직이는 엄마의 손길은 다정한다. 기다란 나무젓가락을 손에 쥐고 반찬을 한곳으로 모으고 있다. 세 칸짜리 반찬통에 소분한 반찬들이 정갈하게 담긴다. 대부분 평소 식탁에 오르는 반찬들이다. 그중 내가 자주 집어드는 반찬들로만 모여있다. 계란말이, 시금치무침, 콩나물무침, 무말랭이, 김장김치, 오이김치, 소시지야채볶음, 진미채 등등. 그들은 매일 사이좋게 순서를 바꿔가며 도시락 한 칸을 차지한다.
엄마는 골고루 먹을 수 있도록 최대한 겹치지 않게 담아준다. 나물과 고기를 한 종류씩 넣어 영양가가 있는 도시락이 된다. 그럼에도 유독 엄마가 빠지지 않고 매번 넣어주는 반찬이 있다. 그건 김치이다. 겨울에 김장한 김치이거나 며칠 전에 버무린 겉절이이다. 엄마는 밥상에는 반드시 김치가 올라와야 한다는 철칙을 지니고 있다. 혼자 먹는 간단한 밥상을 휙 둘러보고 김치가 없는 것을 발견하면 한사코 한 마디씩 건넸다. 김치 꺼내 먹어. 밥상에는 김치가 있어야지. 김치 없이도 충분히 배를 채울 수 있는 반찬이 있음에도 김치의 부재를 못 견뎌하셨다. 간혹 엄마의 한 마디가 듣기 싫을 때면 김치를 먹지 않아도 일부러 김치가 담긴 반찬통을 열어두곤 한다. 엄마는 항상 밥과 김치만 있어도 충분한 밥상이라고 생각하였다. 입맛이 없어도 그 조합이라면 한 그릇 뚝딱 해치울 수 있다고 믿는 탓일 테다. 그래서 작은 도시락통에는 엄마의 신임을 한몸에 받는 김치가 매번 들어와 있다.
반찬을 모두 담아낸 엄마는 칸 없는 도시락통을 들고 전기밥솥 앞으로 다가간다. 밥솥을 열자 모락모락 하얀 김이 해방감을 맞이한다. 한 주걱 들어 올리자 윤기가 번들거리는 하얀 쌀밥이 모습을 드러낸다. 한 톨도 떨어트리지 않기 위해 도시락통에 옮기는 엄마의 움직임이 조심스럽다. 두세 번 움직이니 어느새 비어있는 통에는 밥으로 가득 찼다. 뚜껑을 닫자 갈 곳 잃은 김이 찰싹 달라붙어 하얀 도화지를 만들어낸다. 밥통 위에 반찬통을 겹쳐 모으고 도시락 주머니에 넣는다. 수저통에 젓가락과 숟가락이 들어있는지 열어보며 다시 한번 확인한다. 도시락 주머니에 모두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 지퍼를 쭉 끌어올린다. 그렇게 엄마의 도시락은 완성된다.
아침 세수를 하고 방으로 돌아오면 책상 위에 살포시 도시락이 올려 있다. 출근 준비를 마치면 도시락을 손에 쥐고 집을 나선다. 버스에 앉아 도시락을 무릎 위에 올려두면 밥에서 흘러나오는 온기가 느껴진다. 다스하고 다정한 밥의 온도만큼 하루를 견딜 온기를 지닌다. 엄마가 도시락을 싸준다는 말에 직장 동료는 눈초리를 보내곤 한다. 다 큰 어른이 여태 엄마의 손길이 필요하냐며, 그 정도는 혼자 할 수 있는 거 아니냐며 말을 덧붙인다. 홀로 아침마다 분주한 엄마의 모습을 보면 죄송한 마음도 들지 않을 수 있을까. 대체로 집에 있는 반찬과 밥을 담아 가기에 충분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엄마가 싸준다고 할 때 나서지 않았다. 모순되게도 엄마의 부지런한 아침이 내게 필요했다. 아직 낯설고 서툴기만 한 직장생활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편히 둘 곳은 도시락을 먹는 점심시간이었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도시락을 보면 잠시 긴장을 풀어낼 수 있었다. 엄마가 아침마다 정성스레 싸준 도시락에서 피어나는 온기를 머금었다. 집밥이 그대로 들어있는 도시락은 내게 잃고 싶지 않은 응원이었다. 든든한 식사 한 끼가 되라는 엄마의 다스함과 무사한 하루가 되기를 바라는 나의 염원이 한 줌 한 줌 담겼다. 가끔 도시락으로 투정을 부리며 직장생활의 고단함을 표현하기도 하니 내겐 도시락은 밥 한 끼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소란한 아침을 맞이한 엄마의 도시락은 내가 퇴사하기 전까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