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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핑크 Apr 14. 2023

"성장" 아니고 "성"호르몬 검사받으러 왔습니다만.

아직도 의사 중심으로 진료가 진행되는 성장클리닉에 다녀온 후기입니다.

지난주 화요일, 아이와 나는 우리 동네 2차 의료기관 내 소아청소년과에 있었다. 요즘 급증한다는 성조숙증이 걱정되어 부랴부랴 예약을 잡고 아이를 차에 태워 병원에 갔다. 아이 친구들 중 대부분(여자친구들이긴 하다)이 성조숙증에 해당된다는 말을 들어서였다. 올해 6월이 생일이니 만약 성조숙증이라면 그전에 방문해야 실비정산이 되고 또 빨리 발견해야 우리 아이의 키성장에도 문제가 없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차를 타고 대로를 지나칠 때만 보아왔던 병원입구에 들어섰다. 정면에 검강검진센터가 있고 본관은 좌측, 눈에 잘 띄지 않는 안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미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주차장에 어찌어찌 차를 밀어 넣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평일 낮이라 한산해 보였는데 소아청소년과는 대기 인원이 좀 있다. 접수를 마치고 여아들은 가슴발달 상태를 보고 남아들은 고환크기를 본다는 안내문과 몇 가지 질문이 적힌 질문지를 받았다. 삐뚤빼뚤 보였다 안보였다 하는 글씨가 가득하다. 무슨 잡지에서 구절마다 오려서 붙인 것도 아니고 엉성하다. '여기 2차 의료기관 맞아?' 마음속에 스멀스멀 불신의 싹이 튼다. 대강 만들어졌고 또 대강 관리되고 있는 것 같은 질문지에 우리 정보를 '정성껏' 적어냈다. 엄마 아빠의 키, 엄마의 초경 시기, 만 1세의 체중 등 (돌 무렵의 체중을 특별히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까) 지난 1년간 몇 센티가 자랐는지를 적는 부분도 있었는데 우리 아이는 폭발적인 성장보다 꾸준한 성장 중이라 에미인 나조차 신경을 못쓰고 있어서 패스하고 다른 병증도 없어서 또 패스... 알아보기 힘든 글씨는 열심히 쳐다보며 질문지를 작성했다. 특별한 내용이 없어 보인다. 중간에 그런 생각은 잠깐 들었다. '설마 부모 키를 평균 내서 아이 미래 키를 예측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건 나도 한다...' 그럴 리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을 안고 진료실에 입장했다. 네이버 블로그에서 서치 했던 담당 의사 선생님은 성장클리닉 분야의 전문가이며 친절한 분이라고 했다. 하지만 선생님의 첫인상은 평범, 그 자체였다. 도리어 진료실로 들어가서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선생님이 쥐고 계신 팔찌 비슷한 물건이었다. 짙은 갈색의 동그란 알이 연결되어 만들어진 그 물건은 옛날옛적 스님들이 시주받으러 다닐 때 쓰셨던 염주와 몹시 비슷했다. 나도 모르게 의사 선생님의 얼굴과 염주 모양의 그 물건을 번갈아보았다. 달려있는 알들은 크기가 다양했고 선생님은 부지런히 알들을 매만졌다. 그 크기를 기억하려 애쓰는 중인 것 같았다. 이유는 곧 밝혀졌다. 그건 다름 아닌 고환 팔찌였다. 신체나이에 따른 고환의 크기를 알려주는 물건. 그래서 아이의 고환 크기를 진찰하기 전에 열심히 만져서 그 크기를 가늠해 둔 것이다.


진료 전에 미처 화장실에 못 간 아이는 오줌을 참느라 힘들었다고 했다. 정신을 다른 곳에 팔게 하기 위해 마취하듯 선생님이 몇 가지 질문을 던지셨지만 그 질문들은 급소 근처의 살이 깊숙이 눌리는 공포 앞에 맥을 추지 못했다. 고환이 밖으로 온전히 돌출되지 못한 경우를 감안해서 속에 숨어있을지 모르는 부분을 확인해 보는 과정이 필요했던 거였다. 선생님은 꽤 긴 시간 고환의 크기를 측정하셨다. 그리고 갑자기 거세된 수소 얘기를 하셨다. 수소를 거세하게 되면 성장은 더뎌지고 살은 잘 찌게 된단다. 우리 아이의 경우 다른 신체 부위보다 배가 좀 나왔는데 아래뱃살이 고환의 완전한 돌출을 방해하는 것 같다고. 그래서 거세된 수소처럼 살이 잘 찌는 걸지도 모른다고. 살을 좀 빼자고 하시고는 성장호르몬 수치 확인을 위한 혈액검사와 엑스레이를 권하셨다.


먼저 아이 소변부터 누였다. 꾹 참고 잘 버텨준 아이가 고마웠다. 그리고 혈액검사실로 향했다. 그런데 웬걸, 소변검사도 한단다. '응? 그런 말 없었는데?? 진료실 앞에 혼자 계신 간호사분은 분명 혈액검사와 엑스레이라고만 알려줬는데... 뭐가 이렇게 엉성한 거야...' 불신의 싹은 이제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슬쩍 화가 났지만 일단 참았다. 좋은 게 좋은 거다. 얼른 검사하고 여길 뜨자. 비용이 18만 원이나 나왔고 보험처리도 안 되는 것 같고 모든 게 허술해 보이지만 우리 아이가 건강한지 아닌지 나보다는 더 잘 알 것 아니냐고 생각해 버렸다. 지금은 당장 눈앞의 혈액채취가 더 시급했다. 혈액채취는 2년 전 과잉치 수술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당시 아이의 혈관이 좁아서 발을 동동 굴렀던 기억이 선명했다. 미리 말씀드리고 얇은 바늘로 혈액채취에 성공했다. 천만다행이었다. 더불어, 아이가 자라서 이제는 혈관이 좁지 않다는 좋은 소식도 들었다.





그다음 주 목요일, 허술한 안내 덕분에 물을 서너 잔이나 들이켜고 어렵게 소변을 받아내어 제출한 지 9일 만이다. 본인들은 어차피 업무 시간이니 괜찮겠지만 바쁜 스케줄 중에 병원에 들렀던 아이는 무슨 죄였는지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영업시간 안에만 제출하시면 돼요'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병원에 있을 수 있는 건 본인들 얘기인데 태평한 대답에 기분도 상했다. 하지만 나는 갑이 아닌 을이었다. 내 건강을 확인해 주는 건 그들이었으므로 나는 약속대로 아이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대기시간이 더 길었다. 기다리며 준비해 간 책을 읽었다. 진료실에서 담당 의사 선생님이 나와서 10분간 휴식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진료실 문 바로 앞에서 책을 읽던 우리 아이 쪽을 한번 바라보시고는 총총 사라지셨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스케줄이 빠듯했지만 결과를 듣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 군말 없이 기다렸다. 두 번째로 우리 아이 이름이 불렸다. 서둘러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일단 성장호르몬 수치는 정상이라고 하셨다. 성호르몬 검사는 안 했다고. '성장호르몬 검사가 먼저이고 그 결과가 안 좋아야 성호르몬 검사를 하는 건가?' 또 질문이 떠올랐지만 왠지 따지는 것 같아서 못했다. 뭐 이렇게 못마땅한 것 천 지지? 성장호르몬 검사와 성호르몬 검사의 차이를 미리 확인하고 오지 못한 나를 때리고 싶다.


하지만 뼈나이는 1년이 빠르단다. 성조숙증이 올 위험이 있다고 하셨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비만이 아니지만 아래뱃살은 아주 위험하다고 하셨다. 성인이 되어 건강한 정자를 생산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다시 수소얘기를 하신다. "거세당한 수소는..." 말이 시작되자마자 "선생님, 그 말씀은 조금 듣기 거북합니다. 아이를 수소에 비유하시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말해버렸다. 갑자기 정적이 흘렀다. '멈칫'하시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지금껏 아무도 그런 말을 못 했나 보다. 선생님은 천천히 의자를 뒤로 빼고 두 손을 모으고 마스크를 벗으셨다. 그리고는 운동을 해야 한다고, 매일 운동장을 열 바퀴씩 뛰라고 말씀하셨다. 비전문가인 나도 할 수 있는 단순한 조언이었다. 하지만 실천하기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차라리 약을 처방하고 규칙적인 식사를 하라거나 음식을 가려야 한다는 진단이 훨씬 더 현실적인 것 같았다. 잠깐 조언의 현실성에 대해 반박하고 싶었지만 조심스레 아이가 실천하기 어렵지 않겠느냐는 말과 함께 나눠서라도 뛰기만 하면 되겠느냐고 좀 더 구체적인 질문을 했다. 어린아이들의 다이어트에 대한 얘기가 뒤를 이었다. 성장하는 아이들은 체중을 줄이는 건 불가능하므로 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키를 키우는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고 하셨다.


아이는 운동장을 뛰면서 뱃살을 관리하고 식사는 군것질을 제외하고 그대로 하면서 성장해야 하는 거였다. 아이의 예상키 얘기도 해주셨다. 슬픈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더니 역시나 내 키와 남편키의 평균치에 5센티 정도를 후하게(?) 더해준 숫자였다. 휴... 논쟁은 아니었으나 진료시간이 계속 길어지고 있었다. 보다 못한 아이가 "나, 운동장 열 바퀴 뛸 수 있어."라고 하면서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이번 방문을 통해서 내가 얻은 것은 우리 아이 뼈나이가 한 살 많다는 것, 성장 호르몬 수치는 정상이라는 것(성호르몬 수치는 의사재량으로 안 했다!!!), 아래뱃살이 생각보다 아주 위험한 것이라는 것, 이 세 가지였다. 이 정도를 얻은 것이 적당한 건지 아닌지 지금은 잘 모르겠다. 6개월 후에 또 오라는데 그때까지 필살의 의지로 뱃살을 빼거나 병원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맨 처음 허술한 서류를 마주했을 때 실망했던 마음은 계속해서 의구심을 키우는 중이었지만 '전문가' 앞에서 나는 갈대처럼 흔들리는 신세였다. 아이 마음에 상처가 될까 봐 모든 건 운동장 열 바퀴에 달린 거라고 단순하게 얘기했다. 감사하게도 걱정하던 나와 달리 아이는 금세 잊어버리고 빠른 회복탄력성을 자랑해 주었다.  


상의가 필요한 순간이다. 6개월 후 추적관찰이라는 명목으로 또 내게 검사비용을 받아가는 건 아닌지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내가 돈 많고 한가한 유한마담쯤으로 보였던 걸까. 아니면 원래 성장클리닉이라는 곳이 이런 건가. 내게 성장클리닉에 방문한 경험은 아이의 뼈 나이와 성장에 대해 조금 더 심각해야 한다는 경각심과 더불어 병원을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심어주었다. 어우렁더우렁 살고 싶은 것은 마음뿐, 조금만 일상에서 벗어나면 주의해야 할 것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의사 재량으로 검사가 진행된다는 현실에 한숨이 나온다. 보다 더 정확한 의사표현 능력을 탑재하고 다른 병원을 찾아봐야 하는 건가? 그것조차 안전할 수는 없겠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여전히 전문가 편향이 존재하는 이 사회가 원망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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