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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다 Sep 24. 2021

사립초를 선택한 이유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

첫째는 사립초등학교에 다닌다.

올해 2학년인데, 사립초에 당첨된 이후 아이의 등하교를 위해 작년에 학교 근처로 이사를 왔다.

어떤 분들은 당첨 안되서 못보내는거지 사립초 좋은거 다 안다고 하지만, 우리가 전에 살던 곳이 나름 강남8학군이어서 그런지, 취학 고민을 앞둔 부모들로부터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바로 이거다.


"왜 사립초 지원하셨어요?"


다녀보니 사립초가 어떤 점이 좋은지 이런건 다음 기회에 다루도록 하고 오늘은 사립초 진학을 결정한 의식의흐름을 더듬어 보겠다.


*** 여기서 잠깐!!


지금부터 *** 표시가 나올때까지는 인트로다. 사립초를 선택한 이유는 없고 계기 정도이니 바쁘면 넘어가도 무방하다.


처음부터 사립초 진학을 고민했던건 아니다.

학군지에 있는 초등학교도 전국에서 손꼽히는 명문(명문 초등학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동네 분들 부심에 따르면ㅎ)이고, 무엇보다 그 동네에서 초중고 학창 시절을 거쳐온 남편의 평가가 좋았다.


사실은 사립초 진학을 생각하지 않았던게 아니라,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에 대해 좀 나이브했다.

그냥 학군지 보내지 뭐, 놀이학교가 초등학교 되는거지 뭐- 같은 마음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강남에서 아이를 키우며 '당하더라도 알고 당하자'를 좌우명으로 하던 나답지 않은 상태였던 것 같다.

다행히 나에게는 좋은 언니들(첫째 아이 놀이학교 친구 엄마들. 서른에 아이를 낳았더니 학부모 모임에서는 늘 막내였다)이 있었고, 늘 내 귀를 열고 온갖 정보를 강제 주입해주시곤 했다.


한번은 첫째 친구들과 키즈카페 모임을 했는데, 한 아이의 형이 따라 왔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었는데 동생이 형아랑 같이 가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따라 왔다고 했다.

아무래도 키즈카페에서 놀기엔 큰 아이라서, 엄마들이 모임 곳과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화장실에 가다가 그 아이가 읽은 책을 봤는데, '논어' 였다.

개인적으로 동양철학 고전 중 초등학생 아이가 그나마 읽을 만한 책이 논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실제로 읽고 있는 아이는 그날 처음 봤다.

자리로 돌아가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 엄마가 하는 말이 "큰 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독서 프로그램이 특화되어 있는데 이번달 읽고 있는 책이 논어"라고 했다.

초등학교에 그런 프로그램도 있냐, 다 있는거냐, 뭐 이런 질문을 하다가 그 아이가 다닌 학교가 사립초라는걸 듣고 사립초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게 되었다.


***


이런 계기로 시작하다 보니, 사립초에 호감을 느낀 첫번째 이유는 '다양한 프로그램'이었다.

최소한 내 입장에서는 사립에 보내지 않으면 불가능한 수준의 프로그램들이 제공된다.


큰 아이가 다니는 학교(친구 형아와 같은 학교다)는 1학년부터 졸업까지 고전도서 100권을 읽는 독서 프로그램이 있다.

동서양 고전이 섞여 있는데, 동화나 소설 같은 이야기책도 있고 위인전도 있고 논어 같은 철학 서적도 있다.

한달에 한권 정도 읽으면서 다양한 독후 활동을 한다.

선생님들도 준비를 많이 해주셔서 각종 시청각물은 물론 독서 프로그램과 연결된 바칼로레아 활동도 있다.


사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아 그냥 책을 많이 읽혀주는구나' 생각하고 말았을지 모른다.

그런데 시국이 시국이다 보니 1학년부터 온라인 수업을 할 수 밖에 없었고, 1학년 담임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루하루가 강제 공개 수업이었다.

어떤 준비를 거쳐 어떤 수업을 하는지 알 수 있었고, 상당히 알찬 수업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학년 별 프로그램들도 많다.

교육 연극 수업에는 갈등, 분노, 자아, 행복 같은 감정과 추상적 개념을 다루면서 자신의 멘탈과 정서를 보듬는 법을 배운다.

창의융합 프로그램은 과학 미션을 수행하는 수업인데, 찾아보니 나사에서 어린이를 위해 개발한 프로그램을 도입한 것 같았다.

그리고 1학년 때부터 중국어를 배우는데, 첫째는 중국어 시간을 상당히 좋아한다.

2학년쯤 되니 제법 중국어를 하게 되었고, 고학년을 둔 엄마들 말에 따르면 4~5년 정도가 되면 자기들끼리 중국어로 떠들기도 한다고 한다.


영어는 방과후프로그램으로 주5일 수업이 있다.

하교 셔틀이 방과후영어 이후에 출발하기 때문에 영어까지가 사실 상 정규 수업이나 다름 없다고 할 수 있다.


학교마다 특성화 프로그램이 다르긴 하지만 사립초등학교는 대부분 이와 유사한 프로그램 다양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이 학교가 '독서 특화'인거지, 매일 영어 수업이 있거나 제2외국어 수업이 있는 것, 그 밖에 정규 수업이 다양한 부분은 거의 모든 사립초가 비슷해 보였다.


방과후수업이 다양하고 (돌봄교실 포함) 경쟁률이 낮다.

많이 신청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프로그램이 많이 개설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지만 있다면 듣고 싶은 프로그램을 모두 들을 수 있다.

(다녀보니, 학교가 신청자 규모에 따라 매 학기 개설된 수업 수를 조절하는 것 같았고, 그래서인지 정원이 다 차지 않은 수업도 있었다.)


이건 워킹맘인 나에겐 꽤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사립초 진학은 고민할 때, '무조건 사립초'를 외쳤던 선배 언니가 있었는데, 그 이유가 이거였다.

공립은 1학년이 12시 30분에 하교하는데 돌봄교실이나 방과후 수업 경쟁률이... 기대하기 힘든 수준이라고 했다.

그러면 아이 돌봐주실 분을 찾아야 하는데, 그런다 해도 어차피 학원을 보내야 해서 결국에는 엄마 퇴근 직전까지 학원 뺑뺑이 코스를 짜게 된다고.

엄마들의 교육열이 엄청나서 학원을 열몇개 다니는게 아니라 엄마 퇴근까지 버텨야 하니까 요일 별로 학원을 세팅하다 보니 그렇게 되는 거라고.


이거랑 비교해보면 사립초가 비싼 것도 아니다, 안전한 환경에서 다양한 수업이라니 얼마나 좋냐 등등.

아이의 사립초 진학에는 워킹맘 관점에서 강추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반영되었다.


같은 맥락으로, 방과후 프로그램도 다양하지만, 정규 수업 퀄리티도 좋아서 학원 필요성이 덜하다.

물론 이건 엄마에 따라서, 아이에 따라서 어디가나 천차만별이겠지만, 확실히 강남에서 공립초 다니는 아이들보다 첫째 아이 같은  친구들이 학원을 다닌다.

아이가 부족하거나 더 잘하고 싶은 영역에 맞춰서 수학, 영어 정도 다닌 것 같고, 우리집 아이는 그 마저도 안다닌다.

특히 예체능 쪽은 거의 학교에서 커버해주시는 편이다.

체육 시간에 승마나 양궁, 골프 같은 걸 하기도 해서 아이들 만족도도 높다.

언어와 예체능, 특성화 프로그램 쪽은 모두 과목 선생님들이 붙어 계시기도 한다.


사실 여기까지는 '호감' 수준이었고 나에겐 그닥 결정적이지 않았다.

나름의 기준과 돌파구가 있었기 때문인데, 하여튼 매력적이었지만 결정적인 한방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런 나에게 결정적이었던 건 다름 아닌, '담임 복불복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사립학교를 추천하는 엄마들이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게, 선생님이 다 좋으시다, 공부도 많이 하시고 수업 준비도 많이 하신다, 선생님 간의 노하우 공유도 잘 되시는 편이다, 무엇보다 아이들을 다루는 선생님으로서의 자질과 인성, 역량도 뛰어나신 편이다 등등 선생님 칭찬이 많았다.


부모 복만큼이나 중요한게 담임 복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선생님이 얼마나 큰 영향을 주게 되는지, 특히 초등학교 선생님의 절대적 지위를 너무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좋은 성생님들이 있었고 쓰레기 같은 선생을 만났을 때 그 영향을 줄이기 위해 우리 엄마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이제는 알고 있다.


그래서 사립초를 추천한 이유가 '선생님'일때 상당히 혹했는데, 조금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었다.

전국에서 좋기로 손 꼽힌다는 인근 공립초에서 1학년 담임 선생님이 바뀌는 사건이 발생했다.

정년을 코앞에 두고 있던 선생님은 1학년 아이들에게 "니들은 학원에서 다 배웠으니까 수업할 필요도 없다"며 자습을 시키고, 남자 아이 2명을 본보기로 삼아 벌을 주거나 혼내며 교실 분위기를 잡았다고 한다.

특히 그 본보기가 된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 1분만 늦게 들어와도 다음 시간 내내 복도에 서 있도록 했고, 교실에서 떠들면 뒤로 나가 손을 들고 서 있도록 했다고 한다.


다행히 이 동네 아이들은 선생님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는 착하고 순진한 어린이들이 아니었고, 가정 폭력, 학교 폭력, 성 문제 등 각종 위험 상황을 감지하고 대응하는 교육을 받아온 어린이들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상하다. 요즘 이런 교육은 다 하지 않나.)


결과적으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한 엄마들이 학교에 건의하고 이를 알게 된 담임이 반 아이들에게 복수(니들이 내가 수업 안한다고 했다며? 오늘부터 쉬는 시간 없다- 같은 것)를 하길 반복하다가 2학기에는 담임이 바뀌었다.


하지만 엄마들은 무척 속상해 했다.

그런 선생님과 계속 함께 생활하도록 하기엔 너무 어려서 어쩔 수 없었지만, 담임이 바뀐게 좋은 경험은 아니다 보니.

무엇보다 아이들이 잘못된 승리감에 도취되진 않을까 걱정도 되고.


사립초라도 해서 선생님 차이가 없는건 아니지만, 복불복이라고 할 수준은 아닌 것 같다.

특히 모든 선생님들이 전반적으로 다정하고 사랑이 넘치는 편이다.

교사로서 권위를 가지면서도 고압적인 분이 없다.

첫째가 학교에 다니면서 담임 선생님에 대해 내린 평가가 "무서우신데 다정해서 선생님이 좋아" 였다.


그 밖에 소소한 이유들이 많다.

과장 없이 신발/양말/속옷 빼고는 모두 교복으로 정해져 있다.

입을 수 있는 옷의 종류도 매우 다양하고 가방과 보조가방까지 학교 로고가 박혀 있다.

이게 생각보다 매우 편하고 좋다.


한학년이 100명 안되는 것도 좋았다.

고학년 엄마들 말에 따르면 6학년쯤 되면 전교생이 다들 죽고 못살게 된다고, 졸업할 때 다 같이 부둥켜 우는데 중학교 고등학교 가서도 자주 만나다 보니 대학 가서도 동문회나 동창회가 활발하다고 한다.


물론 갈등하게 되는 포인트도 있었지만, 그건 취향(?) 차이이기 때문에 학교 선택 과정에서 골라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사립초는 악기가 필수인데 우리 첫째는 그 쪽으로는 별로 취미가 없다.

그래서 오케스트라 없는 학교를 골랐고, 방과후수업으로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딱 스스로 즐거울 만큼만 즐기고 있다.


사립초가 기본적으로 공부는 더 많이 시키는 것 같은데, 그래도 좀 덜한 학교를 고르긴 했다.

학부모 회의에서 고학년 어머니들이 "아니 책만 많이 읽어서 뭐합니까, 다른 사립처럼 공부를 더 시켜주셔야 하는거 아닌가요"할 정도ㅎㅎㅎ

어떤 학교는 0교시가 있어서 8시에 등교하기도 하고, 고학년이 되면 한 학년에 한명 정도는 학업 스트레스로 입이 돌아가기도 한다는데, 그건 너무 슬픈 것 같았다.

물론. 이 학교 학생 중에서도 빡센 초딩 삶을 사는 어린이가 이겠지만, 최소한 그렇지 않겠다고 마음 먹으면 그러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다.


이런 의식의 흐름을 거쳐 사립초에 지원하게 되었다.

국제학교는 고민했어도 사립초는 선택지에 없었던걸 생각하면 상당한 방향 전환이긴 했다.

결과적으로 만족하며 다니고 있다. 아직까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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