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수집 일지 9
공황 증상과 우울감에 시달리다보니 시간이 될 때마다 되도록 멀리 나가려고 노력했다. 9월에는 남편과 함께 설악산 곰배령에 올랐다. 평소에 나는 오래 걷지도 못했고, 산을 오르는 것도 싫어했다. 그런데 괴롭고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오래 걷는 것도, 산을 오르는 것도 예전보다 덜 힘들게 여겨졌다. 이것은 바깥의 괴로움을 내 안으로 돌리는 것이기도 했고, 동시에 내 안의 괴로움을 바깥으로 내어놓는 것이기도 했다.
곰배령은 천천히 걸어서 왕복 4시간 정도 걸리는 코스였는데, 초중반까지는 경사가 완만해서 계곡물소리를 들으며 산책하는 기분이었다. 정상에 가까울수록 경사가 가팔라져서 숨도 차고 다리도 아팠지만, 정상에 다다랐을 땐 숨이 트이고 팔다리가 가벼워졌다. 날씨가 흐려서 산안개가 짙게 드리워졌다. 그 경관이 나름 멋있고 신비해서 좀 더 화창했더라면 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흐린 날씨 그대로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산을 내려오는 발걸음은 올라갈 때보다 한층 가벼웠지만 배가 몹시 고파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배고픔이었다. 산을 다 내려가서 식당을 찾아다닐 기운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등산 초입에 지나갔던 강선마을 ‘곰배령이야’라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올라갈 때도 느낀 거지만 식당 여사장님이 과하게 유쾌 발랄하셨다. 오랫동안 정서적 암울기인 나로서는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남편과 나는 산나물전 하나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산나물전과 함께 곰취장아찌가 소스로 나왔다. 허기나 채울 요량으로 별 기대 없이 한 입 밀어 넣었는데, 그 뒤로는 그야말로 ‘순삭’이었다. 인생 처음 맛보는 '맛있음'이었다. 나는 산나물전을 양 볼 가득 입에 물고 다 삼키지도 않은 채, 그 몹시 부담스럽게 여겨졌던 여사장님께 “사장님, 너무너무 맛있어요.”라고 말했다. 말을 했다기보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 여사장님은 내 눈을 그윽하게 바라보시더니 나를 꽉 끌어안고 내 등을 격하게 두드리셨다.
순간 참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 ‘내가 불쌍해 보이나?’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마음 어느 한구석에선 깊은 위안을 받고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사람이, 첫인상도 좋게 보이지 않았던 사람이 내가 세운 벽을 한순간에 허물고 아주 특별한 위로를 해주었다. 내가 잠시 나만의 감상에 젖어있는 동안, 사장님은 다른 손님들에게 유쾌 발랄한 붙임성을 발휘하시느라 바쁘셨다.
산나물전의 맛도 그러했다. 그 자체로 맛이 있었던 거였겠지만, 내 속 사정과 어우러져서 이뤄낸 맛이 따로 있을 것이다. 숨 막히는 우울감에 시달리며 바싹 말라붙어 깔끄러운 입에 식욕을 잃은 지 오래인 내가 괴로움을 피해 도망치듯 오른 곰배령에서 우연히 만난 산나물전의 맛이었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이 상황이 다 지나간 후에 꼭 다시 한번 가서 맛봐야겠다. 같은 맛이 나는지.
맛도, 말도, 사람도, 언제 어디서 어떤 마음으로 만났느냐에 따라 다른 맛, 다른 말, 다른 사람으로 와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