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수집 일지 11
많이 아플 땐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고, 여러 신체감각이 매우 민감해진다. 어떤 소리가 유난히 거슬리고, 뭔가가 피부에 닿는 느낌이 싫고, 특정 냄새에 한층 예민해지곤 했다. 이런 민감함은 내 상태가 점점 나빠져가고 있다는 불안을 더욱 부추겼다. 그런데 이런 내 생각을 조금 돌려놓은 작자 미상의 신앙시 한 편이 있다. 그 일부는 이렇다.
아프지 않으면 드리지 못할 기도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믿지 못할 기적이 있다.
아프지 않으면 듣지 못할 말씀이 있다.
아프기 때문에 드리게 된 기도, 믿게 된 기적, 들리게 된 말씀이 있다는 건, 아픔이 감각을 망가뜨리는 게 아니라 좀 더 확장시키고 개방시키는 건 아닐까? 그냥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싶어졌다.
감각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자체에 깊이 감사하는 기도문도 있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죽음」에서 ‘뤼시’라는 여주인공은 매일 아침 이렇게 기도한다.
살아있음에 감사합니다.
육신을 가진 것에 감사합니다.
오늘도 존재의 행운을 누릴 수 있는 만큼
이에 부끄럽지 않은 하루를 살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뤼시’는 죽은 자와 얘기할 수 있는 영매였는데, 그녀가 말하는 ‘존재의 행운’이란 ‘영혼’이 아니라 ‘육신’을 가지고 있는 것의 행운을 의미했다. 고난과 시련을 포함한 모든 경험을 육신을 통해 느낄 수 있다는 건 살아있는 자만이 누리는 행운이고 감사할 일이라는 것이다. 지금 당장 너무 아프고 괴로운 나로선 ‘행운’도 ‘감사’도 멀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육신을 가지고 살아있는 날들이 부끄럽지 않기를 바라는 ‘뤼시’의 소망은 나의 소망이기도 하다.
가장 색다르게 느껴졌던 기도문은 하와이 전통 치유법인 호오포노포노(Ho’oponopono)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모르나(Morrnah) 여사의 기도문이다. 실제로 ‘Morrnah’s Prayer(모르나의 기도)‘라고 불리운다. 기도의 요지는 마음과 영혼, 잠재의식 속의 부정적인 기억과 에너지를 정화하고, 진정한 자아로 연결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자식이 하나로 존재하는 신성한 창조주여,
만일 내가, 내 가족이, 내 피붙이가, 내 조상이
당신과 당신 가족, 피붙이, 조상에게
태초부터 현재까지 생각으로, 말로, 행동으로 상처를 주었다면
부디 용서를 구합니다.
모든 암울한 기억과 장애물, 에너지, 불안 등을 씻어내고 정화하고 해방하여
이 원치 않는 에너지들을, 순결한 빛으로 변형하소서.
이제 되었습니다.
이 기도문에서 나에게 가장 긴 여운을 남긴 부분은 맨 마지막 ‘이제 되었습니다.’, 영어로는 ‘It is done.’이다. 원래의 진짜 의미가 무엇일지는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이 말이 ‘기도하는 마음을 내었으니 이미 이루어졌도다.’처럼 들렸다. 그냥 나만의 해석일 뿐, 어떤 면에선 오해일지도 모른다. 내가 듣고 싶은 대로 듣는 것일 수도.
종교가 있든 없든 아프면 기도하는 마음이 든다는 걸 나는 생생하게 체험하고 있다. 기도는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바라는지, 자신이 드러내지 않은 진짜 욕구가 무엇인지를 꺼내어 놓는 일일 것이다. 그러니 울림 있는 남의 기도문이 나에게 잠시 위로가 되었다 해도, 나의 소망이 담긴 진솔한 기도문을 완성하는 것은 아직 내 몫으로 남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