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수집 일지 12
얼마 전 양평 일대를 돌다가 양수리 전통시장에 들렀다. 시장 초입 노점에 앉아서 몇 가지 푸성귀를 늘어놓고 파시는 할머니가 계시길래, 고추 3천 원어치만 달라고 했다. 할머니는 검정 비닐에 고추를 담기 시작하셨는데, 멈추지 않고 계속 담으시는 거다. 남편이 “그만, 그만, 그만 주세요.”라고 말하자 할머니는 “그만 줘?” 하시며 그제야 담기를 멈추시고, 거의 꽉 찬 비닐 꾸러미를 남편에게 내미셨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혹시 약간 치매가 있으셔서 양을 가늠하지 못하시나? 돈보다는 그냥 사람들 나눠주고 싶은 마음에 밭에서 난 푸성귀를 들고 나오셨나? 받은 돈은 잘 챙기실 수 있으신가?’ 등등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이런저런 걱정을 했다. 주는 대로 받고 그냥 올 게 아니라 5천 원을 드리고 올 걸 하는 후회도 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몸이 피곤해서 바로 쉬고 싶었지만, 이 많은 고추를 냉장고에 넣어두면 분명히 다 먹지 못하고 버리게 될 것 같았다. 그러면 또 한 번 그 할머니께 죄송할 것 같아서 바로 고추장아찌를 담그려고 간장을 끓이기 시작했다. 고추를 씻고 다듬으면서 그 노점 할머니가 다른 사람들한테는 고추 값을 제대로 받으셨기를, 그날 가지고 나온 야채들 모두 다 잘 팔고 집으로 가셨기를, 그런저런 생각을 하며 살균한 유리병에 고추장아찌를 옮겨 담고 뚜껑을 잘 닫았다.
순간 나는 내가 남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요새 내 생각 말고 남 생각을 한 적이 있었던가? 나한테 벌어진 일, 내 상황, 내 감정 말고 남이 겪고 있는 일, 남의 안부를 걱정한 게 언제였을까?
심리학에 ‘되새김 감정(rumination)’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미 지나간 일, 주로 부정적인 사건이나 상처를 계속 반복적으로 곱씹는 걸 말한다. 이런 되새김은 뇌의 특정 부위를 지속적으로 자극하고, 스트레스 호르몬 분비를 촉진시킨다. 이로 인해 만성 피로나 수면 장애가 생길 수 있고, 우울증이나 불안 장애가 악화될 수 있다.
이런 ‘되새김 감정’은 단순히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만으로 멈춰지지가 않는다. 전문가들은 감정에 대해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고, 제3자의 시점으로 자신의 생각을 관찰하는 훈련을 하라고 조언한다. 나는 그런 훈련을 위해 해보라는 모든 것을 하고 있다. 운동과 명상, 그림 그리기와 악기 연주,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의 대화, 그리고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도 그중 하나다.
어떨 땐 뭐라도 노력하고 있음을 위안 삼기도 하지만, 가끔은 이 모든 노력이 아무 소용없는 것 같아 절망하기도 한다. 그런데 노점 할머니께 고추를 샀을 때부터 집으로 돌아와 고추장아찌 담그기를 마칠 때까지 나의 되새김 감정은 꽤 긴 시간 동안 멈춰 있었다.
3천 원어치라고 하기엔 너무 과하게 많은 고추를 팔아주신 노점 할머니 덕분에 나는 잠시 딴생각을 할 수 있었다. 나 혼자 상상을 보태어 그분을 걱정하고,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며 고추장아찌를 만들었다. 그러는 동안 내 마음은 잠깐 쉴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나 자신을 관찰하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나는 심리 전문가의 조언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아무도 너를 묶지 않았다.’라는 어느 책의 제목처럼 아무도 반복시키지 않은 감정의 되새김질을 나 스스로 멈출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