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장갑에 대한 기억이 준 위로

위로수집 일지 13

by 단비

나의 첫째 이모는 가방에 항상 고무장갑을 넣고 다니셨다. 하루는 내가 물어봤다. 왜 고무장갑을 갖고 다니는지. 이모 왈(曰) 어디 가다 오다 설거지나 빨래 같은 거 해줄 곳이 있으면 얼른 해주고 나오기 위해서란다. 일 보러 다니는 중에 시간이 어중간할 때 주변에 복지시설 같은 곳이 보이면 잠깐 들어가서 속성으로 단타 자원봉사를 하고 나오신단다.


그러면서 감추고픈 비밀인 듯 쑥스럽게 보태는 말은 “어려서 동상에 걸렸어 가지고, 내 손이 찬물에 약하거든. 장갑 없이 맨손으로 하면 좋은데... 그러면 금방 손에 물집이 잡혀.” 두 번 연속 놀라운 답변이었다.


세 번째 이어진 말에는 이모의 성격과 소신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난 남의 일 도우러 와서 ‘장갑 어딨냐, 수세미 어딨냐, 뭐 좀 찾아달라.’ 하는 거 딱 질색이거든. 그런 거 알아서 찾아 쓰던지, 아니면 미리 다 챙겨서 왔어야지.” 그 말을 하면서도 이모는 고무장갑을 끼고 쉼 없이 우리 집 여기저기를 닦고 문지르셨다. 나하고 눈이 마주치면 해맑게 웃으며 “난 움직이면서 얘기 잘하거든. 넌 피곤하니까 거기 앉아서 쉬어. 쉬면서 얘기해.” 못 말릴 걸 알기 때문에 이모 하자는 대로 했다. 난 쉬고 이모는 일했다.


이미 시간이 오래 지난 옛 기억이지만, 기운이 빠지고 의욕을 잃어가면서 이모의 고무장갑이 자주 떠오른다. 이모도 혼자서 감내한 무기력한 시간들이 분명히 있었겠지만, 조카인 나에게 보여준 모습은 언제나 의욕과 활기가 가득 찼다. 환갑을 넘긴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시다.


과거를 돌아보지 말라는 말은 돌이켜 떠올려도 현재에 이로울 게 없는 과거에 한정된 것일까? 나는 요새 과거를 돌아보며 위로를 받을 때가 많다. 위로가 될 만한 기억이 저절로 떠오르는 건지, 내가 위로를 찾아 그런 기억을 떠올려 내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생각해 보니 나는 고무장갑을 보면 첫째 이모가 떠올랐었다. 아, 그렇게 옆에 머무는구나. 옆에 있지 않은 사람이 옆에 머물 수 있는 방법, 그게 기억이었구나.


나도 옆에 있지 않은 누군가에게 기억으로 머물고 있거나, 머물게 될 것이다. 그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기억으로 머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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