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도 힘든 걸 힘들다고 말하기가 힘들다.
실제 있었던 대화를 각색하기도, 상상으로 대화를 구성하기도 합니다. 내 안의 타자와 나누는 대화이기도 합니다. 질문이 남기도, 깨달음이 남기도, 감정이 남기도 해서 '남는 대화'입니다
(아침 출근 시간,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
위층 어른: 학교 다니기 어때?
초등 아이: (엘리베이터 문만 바라보며) 좋아요.
위층 어른: 그렇구나. 학교생활 잘하는구나.
초등 아이: (엘리베이터 문만 바라보며) 네.
위층 어른: 그래. 학교 잘 갔다 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다가 뒤돌아서서)
초등 아이: (나를 바라보며) 근데요, 실은 힘들어요.
위층 어른: 어?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아이는 무슨 말을 더 하고 싶었을까?
힘들다고 말문을 열어낸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친분 없는 어른에게 바짝 경계를 세워 눈도 맞추지 않고 적정선의 응답만 하는 모습이 야무져 보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측은하기도 했다. 같은 건물에 사는 이웃이지만 어른이고 아이고 간에 서로 데면데면 지내는 세태가 안타까웠다. 자기 몸집 만한 가방을 짊어진 아이가 가던 길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학교생활이 힘들다고 하니 마음이 너무 짠했다.
남을 돕기 위해 자신의 힘을 드러내는 건 ‘용기’ 일 수 있지만, 자신을 높이기 위해 힘을 드러내는 건 ‘과시’ 일 것이다. 남의 수고를 덜기 위해 자신의 힘듦을 감추는 건 ‘배려’ 일 수 있지만, 자신의 수고를 덜기 위해 힘듦을 과장하는 건 ‘엄살’ 일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을 돕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것은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나는 그것 역시 ‘용기’라고 생각한다. 남을 돕기 위해 자신의 힘을 드러내는 것에 ‘용기’가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돕기 위해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 짧은 순간에 이웃 어른을 향해 힘들다고 말한 그 어린아이는 큰 용기를 낸 것이다.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잘하진 못한다는 걸, 학교생활 잘하길 기대받고 있지만 그 기대에 다 맞추진 못한다는 걸 인정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나는 그 아이가 가진 그 귀여운 용기로 세상의 좋은 사람들과 단단하게 연결되어 살아가기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