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독서 52일. 문장의 주어가 나를 멈춰 세웠다.
새벽독서 52일. 매일 글쓰기 78일, SSWB-Act 코칭 7주 차
대단히 훌륭한 인간이 위대한 진리를 말하는 듯한 글은 잘 읽히지가 않는다. 오히려 어리석고 나약한 인간이 어떤 마음을 갖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때 글은 더 빠른 걸음으로 내 눈을 통과한다. 그리고 내가 말하지 못했던 마음이거나 설명하지 못했던 생각들을, 작가가 아주 근접하게 표현할 때면 한참을 멈춰 서게 된다.
철학, 문학, 미학, 역사 등을 전천후로 종횡무진하며 역작을 저술하고 있는 알랭 드 보통(이름이 ‘보통’이지만 절대 보통이 아닌 사람)이 죽음 앞에서도 철학적 신념을 지켰던 플라톤의 행위가 작가인 자신의 행위와는 너무나 대조적이라며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타인과 대화할 때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진실을 밝히는 것보다는 상대방의 호감을 사는 것이다.
타인을 즐겁게 해 주려는 욕망에 휘둘려 나는 마치 학예회날 학교를 찾은 학부모처럼 그다지 우습지 않은 농담에도 크게 웃는다.
낯선 사람과 함께 있으면 나는 돈 많은 손님을 맞는 호텔 수위처럼 노예 같은 태도를 취하는데, 이는 호의를 얻으려는 무분별한 욕망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나는 대다수 사람들이 신봉하는 관념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의문을 품지 않았다.
나는 권력을 쥔 인물의 동의를 추구했으며, 그들과의 만남이 있은 후에는 그들이 나를 어떤 존재로 받아들일지 노심초사했다.
- 알랭 드 보통, 「철학의 위안」 중에서
나였다면 이러한 인간의 통속적인 면을 서술할 때 주어를 ‘나’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또는 ‘사람들은’이라고 서술했을 것이다. 인간의 이런 얄팍한 속내는 작가에게만 한정된 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흔히 볼 수 있는 면모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나는’이라고 했다. 이 문장의 주어가 나를 멈춰 세웠다.
사람들이 누구나 갖고 있는 비근한 면을 표현할 때 굳이 남 얘기하듯 말하지 않고, 그런 사람이 바로 ‘나’라며, 자신의 얘기를 하는 거라고 작가는 분명하게 짚었다. 그런데 그것이 나에게는 ‘그런 사람이 바로 너다.’라고 들렸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작가도 그렇다고 하니 말이다.
새벽독서는 한없이 조용한 시간이지만, 끝없이 내가 혼자가 아님을 깨닫는 시간이기도 하다. 나만 시련 속에 좌절하는 게 아니라고, 나만 부질없이 애쓰는 게 아니라고, 나만 답을 못 찾고 헤매는 게 아니라고. 새벽독서는 나에게 그렇게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