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세프 말레이시아 코로나 대응팀을 이끌며
아침을 먹고 자리에 앉아서 저녁을 먹으러 일어나는 일상을 반복한 지 2주일.
유니세프 말레이시아 사무소 코로나 대응팀을 이끌며 느끼는 소회. 짧게나마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에 주말에 남기는 단상들.
1. 한 달간의 락다운.
처음에는 2주만 버티면 될 줄 알았는데. 2주가 더 늘어나면서 총 1달간 말레이시아가 락다운 되었다. 유엔도 모두 재택근무 모드로 바뀌었고, 슈퍼를 갈 때도 성인 1명만 갈 수 있고, 이제는 동네 아파트를 조깅하는 것 가지고도 경찰차가 출동하는 상황이 되었다. 한국 슈퍼 가서 죠리퐁 하고 비비고 만두를 너무 사고 싶은데 한국 슈퍼는 멀어서 경찰한테 걸릴까 봐 못 가는 요즘. 한국의 자율적인 규제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매일 느끼고 있는 요즘. 강경화 장관님이 BBC 인터뷰에서 강조했던 민주주의의 가치로 접근한 우리의 방법이 얼마나 옳은 건지 아시려나요.
2. Can we zoom?
줌의 시대다. 스카이프를 오래 써왔지만 한 6개월 전부터 유니세프가 줌 어카운트를 구입하면서 줌을 쓰기 시작했다. IT 담당자는 이 상황이 올 줄 알았던 것일까. 모두가 재택근무하는 상황에서 줌은 육체적 거리를 훨씬 줄여준다. 경험해본 사람만이 안다는 줌. 스카이프는 왜 줌처럼 못해왔던 걸까. 줌의 최대 장점은 개방성. 내가 링크를 열어두고 어느 누구도 클릭 한 번으로 나와 만날 수 있다는 장점. 요즘엔 아예 링크를 하나 열어두고 전화 대신 링크를 보내 매번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다. 단점이라면 그래서 더 콘퍼런스 콜이 횟수가 많아진다는 느낌이 든다는 점.
3. 누구를 도울 것인가.
얼핏 생각하기로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과 그 가족을 돕는 게 맞을까 싶지만. 그건 정부의 역할이다. 특히나 말레이시아 같이 선진국 문턱에 있는 국가는 더욱 그렇다. 유엔이 절대 국가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으며 해서도 안된다. 우리의 역할은 The people left behind. 즉, 제도권 밖에 놓여 있는 취약계층의 보호다. 락다운 되어서 학교를 못 가는 아이들의 심리적, 정신적 건강, 그로 인한 가정 폭력의 증가. 동시에 일용직 가장이 일이 없어짐으로 당장 생활이 어려워지는 가정의 아동들. 좁은 공공주택에 모여 살아 사회적 거리두기는 남의 일인 아이들. 국가의 서비스 커버리지 밖에 있는 난민 아이들, 미등록 거주자 자녀들, 기관의 보호 안에 있는 장애아동들. 소년원과 감옥 같은 시설에 있는 아동과 여성들이 우리의 대상들이다.
4. 너희는 계획이 다 있구나.
유니세프의 긴급구호에는 공식이 있다. 즉, 딱 무언가 터지면 본부부터 현장 사무소까지 후닥닥 텐트를 친다. 진짜 텐트 말고 긴급구호 오퍼레이션의 텐트. 전담 팀이 꾸려지고 분야별로 가이드라인과 지표들. 그 지표들을 관리하는 툴. 펀딩을 위한 글로벌 레벨의 노력들. 그것의 디테일을 채워주는 현장 사무소의 계획들. 본부부터 현장사무소까지 담당자가 정해지고 본격적으로 오퍼레이션이 시작되는데 3일이면 족하다. 긴급구호가 터지면 다들 상황을 파악하기 바쁘지만 프로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고 유니세프의 Mandate에 맞추어 차근차근 움직인다. 사실 말레이시아 사무소는 긴급구호 경험이 없기도 하고 국제 직원들도 새로운 사람들이 많아서 초반 일주일은 왜 우리가 이걸 하는지에 관한 설명을 하는데 시간을 많이 보냈지만 2주 차에 들어서며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5. 경험은 지식보다 강하다.
긴급구호의 성격은 모두가 다르지만 단계별로 해야 하는 것들은 비슷하다. 딱 터지고, 무언가 발령이 되면, 기관별로 코디네이션 미팅 (클러스터)들이 가동이 되고, 기관별로 중복이 되지 않는 needs assessment를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하고 설익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절대 완벽한 계획은 없다) 기관별로 계획을 세운다. 리소스가 많은 기관들이 자연스럽게 리드를 하게 되고 작은 기관들이 곳곳을 채우는 형식으로 진행이 된다.
계획을 세울 때 보면 경험이 드러난다. 긴급구호가 발동되면 3일 정도안에 초반 계획이 나와야 하는데 6개월-1년을 내다보고 예산을 많이 요청하는 팀이 현명하다. 처음부터 완벽한 계획이 없다고 소극적으로 난 10만 불만 있으면 되라고 하는 팀은 막상 팀별로 요청 예산을 까 보면 1백만 불을 한 팀을 보고 깜짝 놀란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1백만 불을 올려놓고 70-80만 불 펀딩을 받아서 1년간 사업을 진행하는 게 정답이더라. 10만 불 올려놓은 팀은 사람도 못 뽑고 결국 7-8만 불 받고 섹터에서 리더가 되기보다는 팔로어가 되어 나중에는 바쁘긴 바쁜데 퍼포먼스를 내기 힘든 모습을 보게 된다.
이런 것들은 그 비싼 학교에서도 책으로 배우지 못한 것들인데. 대부분 현장 경험이 많은 보스들로부터 배웠다. 긴급구호를 많이 겪었던 네팔 보건팀장의 지진 첫날 여유롭던 모습이 아직 기억이 남는 건 그의 경험을 어깨 넘어 배운 것을 여전히 써먹고 있기 때문일 게다. 그 사람이었다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며 꾸역꾸역 긴급구호 오퍼레이션을 코디네이션하고 있는 요즘이다.
6. 나는 이 일을 왜 하는가
코로나가 오고 있는 것을 알았지만 말레이시아가 긴급상황이 된 것은 락다운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16,000명이 모인 종교행사에서 전염이 되면서 사태가 급박해졌고, 급기야 총리가 담화를 발표하며 우리 사무소도 긴급구호 모드가 발동이 되었다. 사무실의 긴급구호 담당자였던 나는 졸지에 코로나 대응팀을 총괄해서 코디를 하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어깨가 으쓱했던 것은 잠시 쏟아지는 일과 긴박한 스케줄에 속이 쓰리고 머리가 아파왔다. 며칠 초반 설계를 위해 시간을 보내며 아침부터 밤까지 육아를 버려둔 채 (ㅠㅠ) 일을 하고 나니 정말 못해먹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왜 나한테 이런 걸 다 시키는 건지. 가정에도 죄책감이 말도 못 하게 드는데 다들 나한테 이것저것 물어보며 조언을 구하는 상황에 정말 한국으로 도망가고 싶었다. 내가 사무소장도 아닌데 코로나 관련해서는 다 나만 바라보는 느낌에 숨 막혔던 것이 사실.
마음을 돌아보며 기도를 하며 드는 생각들이 나를 다시 붙잡았다. 내가 대출까지 받아가며 석사를 한 이유. 회사를 때려치우고 아프가니스탄에 간 이유. 네팔 지진 후에 남은 이유. 모두가 같았다. 나에게 이 일은 사명이기 때문이다. 조금 평온한 말레이시아에 적응이 되었던 나에게 다시 혼돈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게 쉽지는 않았음을 인정한다. 그렇게 며칠 마음이 너무 힘들었지만, 그다음 날 옷장에서 유니세프 티셔츠를 꺼내 입고 줌 회의에 참석했다. 네팔 지진 구호 때 입었던 그 티셔츠. 다시 생각하니 감사할 이유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 주변에 안전하게 있는 가족. 그때처럼 금이 가지 않은 벽. 슈퍼에 가면 구할 수 있는 음식들. 끊기지 않는 전기. 따뜻하게 나오는 물.
7.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가장 중요한 일은 유니세프 사무실 긴급구호 계획과 예산을 관리하고 다른 기관들과의 코디네이션 하는 일이다. 사무실 구석구석 일어나는 일을 수합해서 리포트를 작성해서 공유한다. 매주 있는 전체회의에서 진행 상황과 펀딩 플로우를 업데이트한다. 그다음에 중요한 일은 WHO와 함께 보건부 RCCE (Risk Communication and Community Engagement) 계획을 수립하는 것을 지원하고 특히 취약 계층에 특화된 메시지들을 개발하고 활용하도록 독려하는 일을 한다. 락다운 기간이지만 보건부 미팅에는 갈 수 있는 스페셜 패스가 있어서 보건부에 가보니 보건부는 비상이라 전원 출근해서 일을 하고 있더라.
그리고 청소년팀을 슈퍼 바이즈하고 있어서 청소년들을 위한 콘텐츠를 개발하고 락다운 상황에서 청소년들과 커뮤니케이션하는 채널들을 개발하고 있다. 이미 유니세프 유스 홍보대사와 손 씻기 관련한 노래와 춤을 만들어서 하나 던졌고, 유니세프 이노베이션 팀의 RapidPro를 활용해서 텔레그램에 COVID-19 Classroom을 만들어서 청소년들을 모으고 있다. 이 방에 들어오면 앞으로 2주간 매일 코로나 레슨 패키지를 받게 되어 수많은 정보 중에 꼭 필요한 정보들과 퀴즈와 노래 같은 것들을 볼 수 있는 방이다. 사실은 학교를 가고 커뮤니티를 가서 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현재는 그게 불가능해서 대안으로 만들어낸 채널인데 잘 되면 좋은 사례로 남을 것 같다. 우리 팀에 Teach for Malaysia 출신 친구가 있어 아이들을 위한 커리큘럼을 뚝딱 개발해냈다. 팀원 복은 내가 정말 있다.
마지막으로는 인도지원 NGO와 함께 취약계층에 긴급구호물자와 위생교육, 심리상담지원 관련 프로젝트가 준비되어있다. 락다운만 끝나면 저 멀리 사바주의 미등록 아동들의 학교부터, 지방에 있는 소년원들, 도시 빈민들 거주지, 난민학교 등을 차례차례 방문하며 이번 기회로 손 씻기 관련된 하드웨어도 고칠 예정이다.
8. 누구 돈으로 도울 것인가
긴급구호는 펀딩으로 시작해서 펀딩으로 끝난다. 대규모의 지원이 들어갈 때, 특히 코로나 같이 전 세계가 같은 물자 (마스크, 손세정제, 온도계, 등등)을 가지고 경쟁할 때는 비용이 더 들어간다. 안타깝지만 인도지원은 펀딩이 없으면 오래가기 힘들고. 그래서 펀딩을 모아 올 수 있는 큰 단체들이 있고, 그 단체들이 작은 단체들과 함께 파트너십을 맺어서 일하는 큰 산업이기도 하다. 아태지역에 코로나가 크게 터지니 처음 펀딩을 들고 유니세프에 온 두 국가. USAID와 일본 정부. 특히 일본 정부는 이 지역 전체에 가장 큰 펀딩을 주면서 유니세프 코로나 대응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모두가 알지만 일본 내부적으로도 코로나가 큰 일인데 이 와중에 지역에 그 큰 펀딩을 주는 걸 보면서 역시 일본이 이 지역에서는 여전히 큰 손이란 생각을 해보았다. 개발 프로젝트는 동남아시아 지역에 그래도 한국이 조금 많이 나가 있지만. 이렇게 긴급구호가 터지면 진짜 큰손이 누군지 드러난다. 일본 정부의 빠른 지원으로 지역 내 특히 보건 시스템이 열악한 곳들은 큰 도움을 받고 있다. 인도적 지원이야 말로 가장 "비정치적"인 펀딩이라 생각하는데, 일본 정부의 스케일에 다시 한번 놀랐다.
9. Life goes on
삶은 계속된다. 아무리 분쟁 현장이라도 지진현장이라도 우리의 삶은 계속된다. 이런 일을 하는 우리도 사람이기에 주말이 필요하고 휴식이 필요하다. 기계처럼 일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빠른 속도로 달리다 보면 멈추어도 몸이 앞으로 끌려가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의식적인 쉼이 필요한 시간이다. 이 레이스는 생각보다 길 것이기에 초반에 힘을 다 빼버리면 안 된다. 사명이지만 냉정하게 일로 접근하고자 한다. 주말에는 쉬고, 밤이 되면 끄고. 그런 의식적인 노력이 나의 삶과 가족을 최소한이라도 지키는 길이란 생각을 해본다. 그걸 바탕으로 주중에 또 열심히 일하면 되니까 because life goes 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