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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Sep 11. 2022

하버드는 당신의 성공을 바란다

교육의 목표는 외움이 아니라 배움이다. 

1.

하버드의 본격적인 첫 학기가 시작되었다. 신입생들의 분주한 발걸음과 여름을 어디선가 의미 있게 보내고 온 고학년들의 익숙한 발걸음이 겹쳐 학교의 복도는 사람과 대화가 넘쳐난다. 동시에 곳곳의 강의실에는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학생들의 키보드 소리와 질문들이 교실을 가득 채운다. 


2.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수업과 시험은 두려운 존재였다. 그들이 말을 할 수는 없지만, 흡사 "나를 다 외워서 너 머릿속에 집어넣지 않으면 널 망치겠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대부분의 대학 수업과 시험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교수님이 가르쳐준 내용이 가득 찬 노트를 달달 외우고, 정의를 외우고, 숫자를 외운다. 교수님의 피피티와 내가 적은 노트를 시험 시작 전까지 머릿속에 최대한 쑤셔 넣는 게 목표였다. 그리고 시험이 시작하면 빈칸이 가득한 시험지에 까먹기 전에 빨리 던져놓는 느낌이었다. 시험은 이처럼 나에게 실패하지 않기 위해 넘어야 되는 산 같았다. 배움보다는 외움에 가까운 그런 존재였다. 


3.

그런 교육에 익숙한 나에게 하버드의 수업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일단 시험이 대부분 테이크 홈 시험이다. 즉, 정해진 기간 안에 언제든지 혼자 보고 온라인으로 제출하는 시험. 당연히 오픈북이다. 내가 시험 전까지 달달 외워서 안 까먹으려고 했던 것들을 보고 풀 수 있다는 것. 그 말인즉슨 외워서 팩트를 쓰는 시험이 아니라 팩트를 바탕으로 논리를 전개하라는 말. 테이크 홈이 아닌 통계 수업은 교실에서 같이 시험을 본다. 그러나 교수는 대놓고 얘기한다. Cheat sheet (커닝 페이퍼)를 들고 시험에 들어와도 된다고. 더 어이없는 건 학생의 질문이다. 당연한 듯이 "그럼 커닝 페이퍼 사이즈는 어디까지 허용이 되는가?" 묻고, 교수는 "A4 앞뒤로 한 장이면 되지 않을까?"라고 답을 한다. 교수와 그 학생은 모두 알고 있다. 이 수업의 성공과 실패는 내가 통계 공식을 얼마나 외우는 게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풀어낼 수 있는 힘을 테스트하는 거라는 것을. 아, 계산기를 들고 들어가는 건 미국서 아주 당연한 일. 한국이었으면 암산으로 했을 것들을 계산기를 들고 들어가 푼다. 우리가 귀 아프게 들어왔던 "변별력"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누굴 떨어뜨리기 위해 일부러 어렵게 내는 그런 시험이 아니다. 


4.

하버드 수업은 모두가 꼭 배울 수 있게 도와준다 (no one left behind). 보건대의 필수인 통계 수업은 사실 대부분의 학생들이 힘들어하는 과목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수는 강의 중간중간에도 아무리 간단한 질문이라도 "excellent question"이라며 질문을 아주 권장한다. 중간에 끊고 들어와도 전혀 언짢아하지 않는 기색이다. 뿐만 아니라 교수들의 오피스 아워를 홍보하며 꼭 와서 물어보라고 권장한다. 이외에도 조교들이 매주 수업시간과 똑같은 양의 보조 수업을 진행한다. 수업시간에 헛갈렸던 것들을 다시 물어보는 기회다. 이 정도 되면 웬만한 질문들은 다 나오고 수업시간에 질문하기 부끄러웠던 애들도 조교 시간에는 손 들고 질문할 기회를 가지게 된다. 이후 조교와 1:1 오피스 아워 시간도 있다. 정말 계산이 헛갈리면 그 시간에 가서 조교에게 다시 물어본다. 이 정도면 정말 탈탈 털만큼 다 내어주는 것 같지만 끝이 아니다. 내가 정말 이 수업에 뒤쳐질 거 같다고 하면 튜터를 고용해준다. 학교가 돈을 내고 개인과외를 받게 해 준다는 말. 하버드생에게 하버드생이 과외를 받는 셈. 고용창출은 물론 교육의 소비자인 학생에게 밑장까지 다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이다. 


5.

수업은 토론과 질문을 하는 시간이다. 물론 교수님의 "강의"도 있지만, 대부분은 미리 읽어오고, 보고 온 강의 영상을 바탕으로 토론과 질문이 이어진다. 수업에서 교수님의 역할을 퍼실리테이터에 더 가깝고, 프리젠터는 학생들이다. 교수가 준비해온 질문들을 바탕으로 읽은 것을 서로 확인하고 의견을 나누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아까 말한 통계 수업은 강의 영상을 다 보고 들어오는 거라 교수님은 실시간 Poll을 통해서 문제를 내고 "익명으로" 정답을 제출하면 문제를 못 맞힌 "xx%"의 친구들을 위해 학생들에게 질문한다. 이거 왜 오답일까? 그러면 정답을 맞힌 학생이 손을 들고 이래서 정답이다라고 한다. 그러면 교수는 "excellent"하고 간단하게 포인트를 짚고 넘어간다. 수업이 "강의"를 듣는 시간이라기보다는 학생들과 교수의 아이디어를 나누고 머릿속에 흩어져있는 정보들을 정리하고 꾹꾹 다지는 시간이다. 특히 코로나 때 만들어놓은 영상강의들이 많아지면서 이런 "여유"도 생긴 것 아닐까 싶다. 


6.

과제를 줄 때는 "모범답안"을 미리 나눠준다. xx에 관한 에세이를 써라. 프레젠테이션을 만들라고 할 때. 지난 수업에서 잘 한 예시들을 미리 공개한다. 당연히 팩트를 나열하는 평가들이 아니니 베낄 수 없는 형태다. 그러나 학생들로 하여금 "아 교수가 말하는 과제가 이런 거였구나."라고 감을 잡는다. 이로 인해 학생들이 불필요한 곳에 에너지와 고민을 쏟지 않는다. 동시에 이 주제로 잘 쓴 에세이는 이렇게 구조가 생겼고, 이런 표현들을 쓰고, 이런 것들을 인용했구나 배우게 된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나에게 잘 쓴 에세이/시험은 어떻게 생겼는지 항상 궁금했었는데, 다른 친구들의 잘 한 예시를 보면서 더 많이 배운다. 단지 영어적 표현뿐만 아니라 영어적 생각의 흐름까지 배울게 너무 많다. 춤을 출 때 박진영이 "잘 봐봐. 이렇게 추는 거야." 라며 긴 손을 훅훅 휘저으며 가르쳐주면 비슷하게 따라 하는 연습생처럼. 약간의 모방과 영감을 통해 내 것을 만드는 시간을 가진다. 성실한 모방을 바탕으로 내 것을 창조하는 시간이다.


7.

사실 이 모든 것의 바탕에는 학생을 믿는 신뢰가 깔려있다. 오픈북이라도 베끼지 않을 거라는 믿음. 남의 글을 인용했다면 꼭 주석을 달것이라는 믿음. 그런 훈련을 시키는 곳이 학교 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럴 것이라고 믿음을 바탕으로 수업과 시험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다. 마이크로 매니징은 하지 않지만 걸리면 진짜 큰일 나는 것을 알기에 모두가 더 열심히 지키려는 윤리적 기준들이 미국 수업에는 존재한다. 자유 속에 주어진 책임감 같은. 


8.

배움이 누군가가 누구보다 더 잘한다는 기준으로 쓰이지 않을 때 비로소 자기 주도적으로 된다. 수업에서 배우는 내용을 모두 다 기억해야 한다는 부담이 없을 때 수업 내용을 비로소 생각하게 되고, 나의 경험과 분야에 맞게 골라서 섭취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 그 공간에서 기존 것을 바탕으로 한 나만의 새로운 지식이 창조된다. 그것이 시험 전에 엄청 외웠던 그 많은 정보보다 더 오래 머릿속에 남고 다른 지식을 이해하는 틀로 잘 활용된다고 생각한다. 


9.

"하버드는 우리의 성공을 바란다."라고 친구에게 얘기했다. 내가 겪은 하버드의 수업들은 공부할 것이 많을지언정 학생들을 fail 하게 하려고 만들어지지 않았다. 배움의 과정 곳곳에 질문한 공간이 있고, 피드백을 받을 기회가 있고, 뒤쳐질 때 당길 비상버튼들이 숨어져 있다. 그래서 아무리 어려운 수업과 시험이 있어도 이걸 잘 따라가고 포기하지만 않으면 성공할 수 있는 그런 게임과도 같다. 포기하지 않기 위해 교수님들은 그 어떤 질문에도 성의 있게 답해주고 미국 특유의 "excellent question"이라는 인센티브로 모두를 격려한다. 그런 과정을 같이 겪고 난 하버드 학생들에겐 분명히 성취감과 작은 성공의 근육이 쌓일 거고 그게 어찌 보면 하버드를 하버드로 만드는 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봤다. 


10. 

수업과 시험은 외움이 아니라 배움이어야 한다. 외움에는 흑과 백이 분명했고, 얼마나 빨리 달리느냐가 중요했다면, 배움에는 모든 질문과 답이 과정이고, 얼마나 동서남북을 잘 들여다보며 달리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다. 그래서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써놓고 보니 하버드만 이런 것 같지만, 아마도 우리가 말하는 "좋은 교육"의 모습이 이와 같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내가 겪은 미국의 석사와 박사 과정에는 이런 배움의 기쁨이 있었다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다. 


통계수업 뒷자리에서 찍어본 조교 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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