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나 있고 어디서든 일어나는 사고의 종류에 대해 생각하며
위층으로 올라가려고 문을 열자마자 계단과 부엌이 모습을 드러냈다. 왼편에 계단, 정면으로 부엌. 높은 문턱을 밟고 들어서니 부엌 안쪽으로 작은 욕실과 화장실이 보였다. 자잘한 사은품들이 담긴 박스로 가득 찬 부엌에는 뜻밖에 대형 냉장고가 가동 중이었는데 내용물은 콜라 캔 다섯 개뿐이었다. 냉장고 문을 닫고 돌아서자 사은품 박스 사이에 놓인 작은 간의의자와 그 위에 널브러진 낡은 가죽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모서리가 닳아 거의 갈색으로 보이는 검은 가방은 배가 불룩했다. 반쯤 열린 뚜껑을 무심코 들췄더니 가방에서 웬 젖소들이 우르르 뛰어나왔다. 멜론보다도 수박보다도 암소의 퉁퉁 불은 젖보다도 커다란 가슴을 가진 기이한 여체가 표지를 장식한 만화책들이었다.
이곳으로 오는 승합차 안에서 다마오상의 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2층에서 마음대로 지내면 돼. 부엌은 지금 거의 창고로 쓰는데, 뭐 금방 치우니까 가서 치워줄게. 1층에서 잡무 본다는 사내놈은 일 끝나면 집에 가니까 신경 쓸 필요 없고. 그 뭐냐, 한국에 있는 남동생이 스물하나라고 했나? 일하는 녀석도 한 달만 지나면 스물하나니까 동생이다 생각해도 좋고. 아마 부딪칠 일은 없겠지 싶다만 그래도 혹시 불편한 점 있으면 바로 연락 주고.
곧 스물한 살이 되는 스무 살짜리 남자애. 그야말로 갑작스럽게 들이닥쳤으니 미처 치울 틈이 없었을 것이다. 못 본 척 가방을 원래대로 돌려놓는다는 게 그만 뚜껑을 제대로 덮어버렸다는 사실이 생각난 건 다음 날 가방이 사라지고 난 뒤였다. 사은품 박스들이 정리된 부엌에 덩그러니 남은 간의의자 위에는 가방 대신 작은 빗자루와 쓰레받기가 올라앉아 있었다.
숱하고 빤한 일. 대부분의 시간을 한창때 사내애 혼자 지내는 공간과 그 구석에 놓인 가방 속 만화책 따위. 감춘다고 감췄을 텐데도 발견되고야 마는 남동생의 야동 폴더처럼, 짐짓 눈감아 주는 누나처럼. 빤하고 시시한 사건들. 일터에서 쉬운 일만 골라하며 요령을 피우는 인간, 직원용 라커룸에서 도둑질하는 위인, 주변에 여자애가 있으면 어떻게든 수작질하려 드는 남자처럼. 별 볼일 없는 사람, 그저 그런 이성, 뻔히 알면서 속아 넘어가 주는 상황이란 아마 세상 어디에나……
“에취!”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서든 일어나는 사고의 종류에 대해 생각하며 축축한 티셔츠에서 팔을 뺐다. 감기는 딱 질색이다.
“윤상!"
서둘러 옷을 벗는데 별안간 아래층에서 야마모토가 소리쳤다.
"저 잠깐 올라가요!”
후다닥 계단을 오르는 소리, 무언지 모를 부스럭 소리, 쿵쿵 내려가는 발소리. 막 벗은 티셔츠에 도로 머리를 끼워 넣고 방문 바깥으로 고개를 내미니, 문 앞 바닥에 방금 다녀온 슈퍼마켓 상호가 인쇄된 비닐봉투가 놓여 있었다. 아직 따뜻한 도시락과 보리차 캔이 담긴 봉투를 방 안에 들이고 문을 닫았다. 또 재채기가 나서 부랴부랴 다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오늘까지 포함하면 나흘간 내리 휴일이다. 노리코의 부탁으로 출근 날짜를 바꿔주면서 시간표가 완전히 꼬이고 말았다. 휴일이 이렇게 몰리다니. 주변에 별다른 시설이 없는 주택가 외곽, 거의 전단지 제작소로 쓰이는 명목뿐인 신문사 영업소 건물에는 텔레비전도 인터넷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 임시로 한두 달 머무르는 처지에 지붕만 있어도 감지덕지기는 하지만 이런 곳에서 쉬는 날 혼자 할 수 있는 일이란 때를 맞춰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화장실에 가는 일이 고작이다. 아니면 책을 읽거나. 그나마 아침 산책이 유일한 오락거리였는데 비가 쏟아지는 기세를 보아하니 내일까지는 퍼부을 듯싶다.
비가 그치면 모처럼 전철을 타고 멀리 나가볼까. 됐다. 정기권 구간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다 돈이다. 이사 비용에 얼마가 더 들어갈지 모른다. 월급이 나오기 전에 모아둔 돈에 손을 대서야. 다마오상 가족의 호의에 마냥 기대며 신세를 질 수는 없다. 답답한 마음에 샤워 용품과 마른 옷가지를 챙기다 말고 가계부를 펼쳤다. 계산기를 이용하려 휴대전화 폴더를 열자마자 화면이 어두워지며 안내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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