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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행간 새김

사막 하늘에서도 비는 내리고 #2

뛰면 오 분, 걸으면 십 분.

by 해란

난데없는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눈을 둥그렇게 뜬 야마모토가 문을 열고 서 있었다. 웬만해서는 여기까지 올라오지 않는데, 무슨 일이지. 얼결에 눈인사를 건네니 야마모토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문 밖에 멀뚱멀뚱 선 야마모토를 방에 들이기도 뭐해서 옷매무새를 매만지며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 있어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물었다.


“그게, 그러니까, 너무 조용해서…….”


“네?”


“혹시 오늘 몇 시에 일어났어요?”


"음, 여섯 시 반쯤이려나?"


두껍게 쌍꺼풀 탓에 인상이 진한 야마모토의 눈이 더욱 휘둥그레졌다.


“그럼 그때 일어나서 지금까지 방에서 뭐 했는데요?”


“그냥 앉아 있었는데…….”


내 대답에 야마모토는 미간을 찌푸리고 검지로 오른쪽 눈썹을 긁적였다.


“일어나서 쭉 앉아만 있었다고요? 도대체 왜요?”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비가 오고 있어서요.”


내 대답에 야마모토가 울상을 지었다. 어쩐지 무슨 말이라도 덧붙여야 할 것 같았지만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저기, 지금 몇 신 줄 알아요? 오후 두 시가 넘었어요.”


벌써 오후 두 시라고? 내 표정을 본 야마모토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제 뒷목을 문질렀다.


“아무튼 알았어요. 갑자기 올라와서 실례했습니다. 이만 내려가 볼게요.”


낮은 천장에 머리를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계단을 내려가는 야마모토의 뒤통수를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났다.


오늘은 빗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휴일이라 산책을 나가려고 했건만. 우산을 들고라도 나가볼까 고민하다 시계를 확인하니 아직 퍽 이른 시간이었다. 일단 비가 그치길 기다려 보기로 하고, 편한 자세로 앉아 빗방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토독토독, 타닥타다닥. 단조롭고 불규칙적인 소리가 창문을 두드렸다. 그 리듬에 맞춰 맥락 없는 생각들이 담방담방 떠올랐다.


이제 더는 연락하지 않겠다더니 어제 갑자기 도착한 메시지, 곧 해야 할 이사, 한 달 전에 다시 써냈던 교통비 지급 신청 용지 같은 것들이 물수제비 파문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자욱한 물안개에 휩싸인 듯 몽롱한 감각 속에서 눈을 감고 빗소리에 집중했다. 타닥타닥, 토독토도독. 뒤숭숭하던 마음이 노글노글 풀어졌다. 시간이 가는 줄도, 야마모토가 올라오는 줄도 몰랐다.


다시 이불 위로 철퍼덕 주저앉았다. 문득 허기가 졌다. 아래층에 있는 부엌으로 내려가 맥주 한 캔을 꺼내 올라왔다. 맥주를 한 모금씩 넘기며 『모래의 여자』를 읽는다. 중간중간 어려운 한자가 나오면 전자사전을 두드려가며.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고개를 드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그 적막한 풍경을 바라보다가 길 건너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퍼를 대충 걸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여닫이문을 여니 야마모토는 자리에 없었다. 저녁식사를 하러 나간 모양이다. 빈틈없이 닫힌 철문을 밀어 열고 한 발작 앞으로 내디뎠다.


“아, 우산.”


몸을 쭉 빼고 차양 바깥으로 손을 내민다. 빗줄기가 가늘었다. 걸으면 십 분, 뛰면 오 분. 우두커니 서서 오 분쯤 고민하다 무작정 뛰었다. 고민할 동안 올라가서 우산을 가지고 내려올걸. 뒤늦은 후회를 하며 달리는 사이 불을 밝힌 슈퍼마켓 간판이 가까워졌다. 점퍼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언제 빼두었는지 지갑이 없었다.


슈퍼마켓 앞에 멍청히 서서 길게 숨을 내쉰다. 사람이 드나드느라 자동문이 열릴 때마다 눈이 시었다. 대충 빗물을 털며 돌아서는데 별안간 빗소리가 커졌다. 나는 입을 앙다물고 다시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뛰면 오 분, 걸으면 십 분. 에라. 속도를 줄여 터벅터벅 걷는다. 빗발이 자꾸만 굵어지는데 지퍼를 올릴 의욕조차 나지 않았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사무소 건물 차양 아래서 머리를 털고 점퍼를 벗어 물기를 짰다. 미닫이문을 조금만 밀고 막 안으로 들어섰는데 느닷없이 “윤상!”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 뒤로 돌다가 출렁, 문에 몸을 부딪치고 말았다.


노란 우비를 입은 야마모토가 스쿠터에서 내려 이쪽으로 걸어온다.


“으아, 쫄딱 젖었네. 우산도 없이 어딜 갔다 와요?”


“잠깐 슈퍼에 좀…….”


차마 야마모토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대답하는 와중에도 그의 시선이 영 다른 곳에 가 있는 게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어깨가 움츠러든다.


“슈퍼요? 근데 어째 빈손이네요.”


“막상 도착했더니 지갑을 깜빡했더라고요. 그럼 전 올라가 볼게요.”


어색하게 웃어 보인 뒤 얼른 몸을 돌렸다. 사무소 안쪽의 여닫이문을 열고 운동화를 벗으며 높은 문턱 위로 훌쩍 올라섰다. 계단을 오르는데 발을 디딜 때마다 젖은 발자국이 찍혔다. 방문을 소리 나게 밀어 닫고 마른 수건을 집어 들었다. 불현듯 이 건물에 처음 들어온 날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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