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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란 Aug 06. 2024

어머, 이건 사야 해! 하지만 지갑은 닫힌 문

트위터(현 X)에 덕질용 계정을 만들고 나니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끓어오르는 덕심을 맘껏 표출할 공간이 생긴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때껏 나의 관심사 바깥에 존재하던 세계가 거침없이 내 타임라인으로 흘러들기 시작해서였다. 변방의 나이 든 덕후에게 메인스트림의 파도가 와락 밀려들었다고 할까?


실로 오랜만에 맞닥뜨린 아이돌 덕질의 메인스트림, 그곳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큰 존재감을 드러낸 광경은 오색찬란한 ‘굿즈’의 향연이었다.


아이돌의 실물이 담긴 굿즈부터 실물을 캐릭터화해 만든 굿즈, 아이돌이 광고하거나 아이돌과 기업이 협업하여 제작한 굿즈, 굿즈를 꾸미기 위한 굿즈, 굿즈 보관용 굿즈에 이르기까지…… 형형색색의 굿즈가 그대로 밤하늘에 뜬 별처럼 무수히 반짝이고 있었다!


갓 입덕하여 마음이 달뜬 덕후라면 별천지에 들어선 양 황홀해질 법한 광경을 본 나는 갑자기 눈앞이 아찔해졌다. 황홀경에 빠져서가 아니라 내면의 비상등이 번개 치듯 번쩍였기 때문이다.


내가 엉겁결에 굿즈 월드로 들어서기 무섭게 비상등을 켠 것은 첫 글에서 소개한 방해꾼, 그러니까 휴덕하는 동안 내 안에 단단히 뿌리내린 ‘제비(제로웨이스트+비건) 지향인’의 자아였다.


이 ‘제비 자아’는 나의 삶 전반에 관여하는 강력한 자아로서 환경과 동물 보호에 관심이 많다. 환경에 유해하거나 동물을 착취하여 만든 상품은 되도록 불매하고, 실생활에 불필요한 물건은 거의 ‘쓰레기’로 인식하며, 쓰레기를 최소화하려면 무엇보다 ‘소비 자체를 줄여야 한다’고 여긴다. 요컨대 반소비주의 성향이 짙다.


반면 긴 휴덕기를 깨고 돌아온 ‘덕후 자아’의 입장은 사뭇 달랐다. 덕후 자아가 보기에 어떤 종류의 물건(예컨대 최애의 존안이 담긴 굿즈)은 그저 예쁘기만 해도 제 소임을 다하는 것이라 설령 실용성이 제로일지라도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다. 덕후 자아는 부르짖었다. 그 아름다움을 소유하는 일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예쁘면 됐지! 갖고 싶으면 그냥 사!


이래서야 제비 자아가 냅다 비상등을 켜지 않고 배기겠는가. 벌써 9년 가까이 열과 성을 다해 ‘친환경 미니멀 라이프’을 꾸려 온 제비 자아로서는 덕후 자아의 천둥벌거숭이 같은 작태를 도저히 좌시할 수 없었다.


‘하! 어처구니가 없군. 더 날뛰기 전에 본때를 보여 주마!’


결단을 내린 제비 자아는 그길로 덕후 자아의 멱살을 틀어쥐고 야멸차게 쏘아붙였다.


“뭐? 예쁘니까 그냥 사?”

“생활에 필요하지도 않은 걸 사서 어쩌려고?”

“소유욕 채웠으니 그대로 방치하기?”

“방치하면서 죽은 공간 만들기?”

“청소할 거리 늘어서 내심 후회하기? 그러다 처분하기?”

“처분하려고 보니까 분리배출 까다로워서 골치 썩기?”

“결국 아무렇게나 버려서 환경 파괴하기?”

“끝까지 쓰레기 아니라고 우기기?”

“어어? 대답 안 해?”

“눈 피하지 말고 대답!”

똑바로 대답! 너 저게 뭘로 보여? 어?”

“뭘로 보이냐고, 이 자식아!”


쓰, 쓰레기! 황홀하도록 예쁜 쓰레기!


신랄한 맹공에 더는 버티지 못한 덕후 자아가 비통하게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제비 자아도 멱살을 탁 놓고 뒤로 물러섰다. 멱살잡이에서 벗어난 덕후 자아가 풀썩 주저앉아 고개를 툭 떨궜다.


그 가련한 모습에 제비 자아는 큼큼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한 몸뚱이를 공유하는 사이인데, 20년 넘게 뒷전으로 물러앉아 있다 모처럼 돌아온 녀석을 너무 몰아붙였나 싶어서였다.


“크흠, 뭐 100%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지만 승복한 걸로 쳐 줄게. 그럼 이만.”


머쓱해진 제비 자아는 대충 상황을 무마하고는 냉큼 자리를 떴다. 하지만 그러느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주저앉아 고개 숙인 덕후 자아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 오늘의 덕질 일본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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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질에 나이 없다.

推し活に年齢は関係ない。

(오시카츠니넨레-와칸케-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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