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 자아의 예상과 달리 덕후 자아는 순순히 승복하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덕후 자아가 틔운 ‘소유욕’의 싹은 최애의 후광이 내리쬐는 곳마다 터를 잡고 야금야금 세를 불려 나갔다. 양지바른 자리에 하나둘 피는구나 싶었는데, 문득 돌아보면 어느새 온 들판에 흐드러져 있는 들꽃처럼 은밀하고 맹렬하게.
그러던 어느 날, 무성한 들꽃 사이에 누워 있던 덕후 자아가 몸을 쓱 일으켰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몸 이곳저곳에 들러붙은 흙뭉치를 툭툭 털어내는 손길에서는 비장함마저 묻어났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드디어 때가 왔구나.”
덕후 자아는 언제 비장했나 싶게 태연한 낯빛으로 제비 자아를 찾아갔다.
“야, 너 원서 살 때 되지 않았냐?”
“아아, 뭐 그렇긴 한데 그건 왜 물어?”
“그럼 주문하는 김에 이것도 좀…….”
덕후 자아가 건네는 쪽지를 엉겁결에 받아든 제비 자아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손바닥 만한 쪽지에는 낯선 책 제목과 호수가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웬일이래? 책을 다 사 달라고 하고.”
굿즈의 ㄱ자만 꺼내도 노발대발하는 것과 다르게 한결 누그러진 어조에 덕후 자아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동안 와신상담하며 제비 자아의 소비 패턴을 파악한 보람이 물 밀듯 밀려들었다.
책, 그중에서도 일본어로 쓰인 원서는 제비 자아가 선뜻 지갑을 여는 몇 안 되는 품목 중 하나였다. 생업이 책 번역이다 보니 어느 정도는 불가피한 소비 품목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원서와 관련된 물품이라면, 소비에는 민감하지만 ‘덕후 마음’은 잘 모르는 제비 자아의 감시망을 피할 수 있을 법했다.
“호수도 같이 적은 걸 보니 단행본은 아니고 잡지인가 보지?”
덕후 자아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덕후 자아가 사 달라고 한 잡지는 최애가 실린 패션지였다. 표지 모델은 최애가 아니지만 잡지 중간에 최애의 소식이, 그것도 이번 내한 때 찍은 사진과 인터뷰가 수록된! 언제 또 내한할지 모를 최애의 한국 방문기가 담긴 이 잡지를 덕후 자아는 꼭 가지고 싶었다. 드러내놓고 '나 굿즈요!' 하는 물건도 아니고, 어쨌든 일본어로 된 책이니까 이거라면 제비 자아도 깜빡 속아 넘어가지 않을까? 표지에 최애 이름이 적혀 있기는 하지만 팬이 아니고서야 못 보고 지나칠 만한 크기였다.
눈을 가느스름히 뜬 채 쪽지를 쳐다보는 제비 자아를 곁눈질로 살피며 덕후 자아는 침을 꼴깍 삼켰다. 태연을 가장한 겉모습과 달리 가슴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그래, 일단 장바구니에 담아 둘게.
지난번에 덕후 자아를 몰아세운 것이 못내 찜찜했던 제비 자아가 큰 선심을 쓴다는 투로 대답했다. 당장 살 것도 아니니 장바구니에 담아 두는 정도는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장바구니. 그것은 제비 자아의 '소비 유예 박스'였다. 꼭 필요한 물건이라 할지라도 '소비 대상'은 무조건 장바구니에 담긴 채 최소 일주일(길게는 몇 달)을 버텨야 했다. 만약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에도 그 물건이 필요하다면 결제가 이루어지고, 지나고 보니 필요치 않다고 판단되면 즉시 장바구니에서 퇴출하는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덕후 자아에게 그 따위 규칙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오직 '목표물이 장바구니에 담겼다'는 사실 하나였다. 왜냐고?
가라! 소유욕의 들꽃이여!
목표물이 장바구니에 담긴 순간, 덕후 자아는 기다렸다는 듯 제비 자아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러자 언제 번졌는지 모르게 마음 가득 피어 있던 소유욕의 들꽃이 일제히 뿌리를 털고 일어나 제비 자아에게 달려들었다.
“아아악! 이게 뭐야!!!”
순식간에 들꽃 떼에 파묻힌 제비 자아를 뒤로한 채 덕후 자아는 주저 없이 결제 버튼을 눌렀다.
“됐다! 됐어! 으하하하하하!!!!”
덕후 자아의 반란은 그렇게 시작됐다.
** 오늘의 덕질 일본어 **
원서 原書(げんしょ 겐쇼)
잡지 雑誌(ざっし 잣시)
패션지 ファッション誌 (ファッションし 홧-숀-시)
단행본 単行本(たんこうぼん 탄코-본)
내한 来韓(らいかん 라이칸)
인터뷰 インタビュー(인타뷰-)
장바구니에 담다 カートに入れる(カートにいれる 카-토니이레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