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에 드는 게 힘들기 시작했던 건 작년 12월 3일 헤어지고 난 직후부터였다. 상대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도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우리가 이렇게 돌연남이 되어버린다는 것 역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적어도 그때만큼은 그랬었다. 8월쯤? 처음 다투고 나서, 갑갑한 마음에 끊었던 담배를 사서 집 앞 놀이터에서 줄담배를 피다가 전화를 걸어서 풀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생각이 나서 문을 열고 나갔는데 밖에는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고 나는 점퍼 하나만 걸친 채 그 눈 내리는 놀이터에 앉아 눈을 다 맞아가며 그때 피다 남았던 담배를 연달아 피웠다.
"어디서부터 잘 못 됐을까?"
연애전선에 딱히 문제가 있지도 않았었고.. 내 마음이 변한 것도 아니었다. 상대가 변해가는걸 눈치 없는 내가 몰랐을 뿐이었다... 1시간쯤 지났을까? 돌아오는 길에 마시지 못하는 소주를 여러 병 들고와서 벌컥벌컥 마셨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취기가 올라왔을 때 나는 고양이를 안고 잠이 들었다. 그게 아마도 밤 10시쯤..
원래대로라면 술기운에 낮 1시까지는 잠에 허덕였겠지만 그날은 새벽 5시쯤 되어 눈이 떠졌고, 술도 다 깨어있었다. 창문을 열어보니 여전히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고, 아무 생각 없이 고양이와 창밖을 보며 해가 뜨는 것을 지켜봤다. 부산엔 눈이 오지 않아 눈을 보는 게 소원이라던 그 사람이 생각났다. 눈이 내리면 퍼다가 냉장고에 보관하기도 한다는 우스갯소리와 함께.. 왜 하필 헤어진 다음날이 돼서야 첫눈이 내리는 걸까?
"사귀는 중이 었다면 당장 대전에 오라고 전화라도 한통 했을건데.."
해가 뜨고 12시쯤 되니 짙은 후회가 밀려온다. 친구의 말대로, 바람을 핀다는 정황과 증거를 알게 됐던 어제.. 패를 쥐고 있을 때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었었는데...
아직은 나에게 마음이 남아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니, 착각했다. 그래서 그날만큼은 정말 처절하게 붙잡았지만 돌아오는 말은 나의 기대와는 달랐고 내 머릿속은 온통
"왜 이렇게 됐을까?"
란 생각으로 가득 차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좋아하던 게임도, 운동도...
재회 하기 위에 어떤 방법을 쓰든 간에 결국은 같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나를 움직일 수 없도록 한 건 다른 곳에 있었다. 나는 그것을 붙잡을 수 조차도, 나아가 내 의지로 그것을 변화시킬 수 조차 없다는 사실.
그러기에 매일같이 애원하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그것은 수능 성적 발표 이후 원서를 넣은 뒤 대학 입시 결과 발표만을 기다리는 수험생들의 처절한 마음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날 이후론 잠에 들지 못하고 주량도 3배 이상 늘어서 술기운에 잠을 청하기도 어려워졌다. 분명 내 몸에 이상이 생겼으리라.. 뒤늦게 신경과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니 맥박은 정상인의 1.5배 이상이고, 교감신경은 모두 활성화 부교감신경(휴식을 담당)은 모두 비활성화 되어 조금만 더 늦게 병원을 찾았으면 큰일을 치렀을 거라는 소견을 들었다. 도통 잠에 들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하니 필요시에만 먹으라고 수면제를 받았다.
처음엔 반알로 시작해보라는 간호사의 이야기대로 반알을 먹고, 친구가 추천한 "Crazy.Stupid.Love"를 틀어놓고 침대에 누웠다.
(같이 보겠다고 고양이도 내 배위에 올라와서 함께 시청. 사진을 찍으려니 용케 얼굴을 돌려준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도록 잠은 오지 않았고.. 초조해진 나는 나머지 반알도 입에 털어 넣고 다시 누웠다. 약 20분쯤 지나서? 화장실에 가고 싶단 생각에 침대에서 내려오니 몸이 휘청휘청거린다. 만취한 것처럼 균형감각이 사라졌고 이내 누워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해서 다시 누웠더니 바로 잠에 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수면제로 잠에 드는 것도 며칠 지나니 점점 수면 시간이 짧아지고 하루 종일 피로에 시달렸다. 더군다나 종종 시달리는 환각증세는 가위눌리는 것 만큼이나 무서웠다. 분명 잠에서 깼는데, 내 머리맡에서 친구가 부르는 소리, 창가에서 부르는 헤어진 여자친구의 목소리.. 그럴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불속에 웅크려 이 환각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아파하던 나에게 따끔한 쓴소리를 많이 해주던 주현이 덕분에 1월 중순쯤부터는 환각.. 더 나아가서 헤어진 여자친구에 대한 생각 자체가 없어졌다. 입맛도 다시 돌아왔고 생활이 정상으로 돌아왔으나 불면증만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밤새 잠이 오지 않다가 오전 9시쯤 잠들기 시작해서 30분 잠들고, 30분 깨고 를 반복하다 보면 오후 1~2시쯤 수면을 포기하게 된다. 그렇게 지옥 같은 1달을 보내고 지난 월요일에 병원을 다시 찾았을 때는 수면 패턴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고 의사와 진지하게 상담했다. 그래서 처방받은 게 멜라토닌. 미국에선 건강식품으로 나와 있는데 무슨 차이가 있냐 물었더니 약효가 국내 약은 8시간쯤 가는데 건강식품으로 나온 것들은 1~2시간밖에 가지 않아 수면용으로 부적합하다고 한다.
인터넷으로 대충 알아보니, 캐나다에서는 10mg짜리 약을 처방전 없이 구할 수도 있고 미국에서 들여오는 것도 3~5mg쯤 된다고 한다. 약을 받아 뒷면을 보니 이 약은 2mg.... 어?! 다행히 "서방정"이라 적혀있었다. 서방정이란, 약효가 천천히 방출되도록 단백질 코팅막이 중간중간에 있어 약물이 한 번에 방출되는 것을 막아준다. 대표적인 게 아세트아미노펜(타이레놀)-이알서방정.
사실 큰 기대 안 하고 저녁 약+수면제와 함께 그날 복용하니 "어마어마한.." 졸음이 쏟아져왔고 눈을 떴을 땐 13시간이나 지나있었다. 당분간 불면증으로부턴 자유로워졌다. 잠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원래의 내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뿐. 매일 격려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들에게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 추억도 생각이 날 때가 좋은 거라는 NoonSo 누나의 말이 참 가슴에 와 닿는다. 이젠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