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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자기소개 하기

처음 가본 무용 수업, 갑자기 몸으로 자기소개를?

by 노르키
지금부터 자기소개해볼게요. 몸으로 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모두 할 거예요.


싫어요! 라고 말할 틈도 없었다.

어느새 나는 도살장에 끌려온 송아지처럼 사람들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30명 남짓 사람들은 손수건 돌리기 하듯 둘러앉아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 무용 워크숍에 갔을 때는 불편하고 막막했다. 특히 첫 시간에 느낀 감정은 무력함이었다. 갑자기 몸으로 자기소개를 해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여자 무용 선생님은 드라마나 만화책에서 보던 전형적인 무용인처럼 보였다. 어깨까지 늘어뜨린 생머리에, 단단한 근육으로 이뤄진 팔... 연필을 굴리며 살아온 나와는 다른 시간을 보낸 사람 같았다. 무용 선생님 주위에 감도는 공기의 맛은 내 것과는 달랐다.

내 몸에도 20년 넘도록 쌓인 나만의 분위기가 있다. 책상 앞에서 꼼짝 말고 공부하라! 이런 사명을 부여받고, 엉덩이를 의자에 딱 붙이고, 중간중간에 멍도 때리고 졸기도 하면서 견디고 훈련받은 자들의 먹물 냄새랄까. 그런 분위기가 내게도 배어 있는지도 모른다. 하루 10시간 넘도록 의자에 앉아 엉덩이가 짓무를 때까지 앉아 있으면 선생님과 부모님으로부터 칭찬과 격려를 받았던 10대 시절. 음악과 영화를 좋아했던 내가 공부 아닌 것에 관심을 둘까 봐, 부모님은 자주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무용 선생님의 공기는 달랐다. 아마도 하루 10시간씩 근육이 찢어지도록 팔다리를 쭉쭉 뻗고 뛰어다니라고 명령받은 자의 것 같았다.


수강생들은 둥글게 둘러앉아 마른침을 삼켰다. 여태껏 춤 한 번 안 췄는데 갑자기 몸으로 자기소개하라니, 부담스럽고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이럴 줄은 몰랐다. 싫었다. 이런 무겁고 불편한 분위기를 견디는 것도 짜증 났다. 다들 나의 삐걱이는 몸을 보며 비웃겠지? 여기서 나는 너무도 무력했다. 무력감은 내가 가장 견디기 어려워하는 감정이었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무력감에 휩싸일 때가 있었다. 배신감이나 분노, 증오보다도 나를 더욱 밑바닥으로 끌어내리는 것 같았다. 선배는 친절한 얼굴로 웃어주지만 자기 살 궁리로 바빠 사실 내겐 아무런 관심이 없다. 동료들은 옆사람이 미끄러지면 고개를 돌려 히죽 웃는다. 후배들은 앞에선 공손하지만 뒤에선 저 꼰대...라고 욕하기 십상이다. 일은 발전 없이 늘 되풀이된다. 무력감과 맞바꾼 월급으로 이것저것 사보지만 남는 건 텅 빈 마음이다. 어떻게든 그 느낌에서 벗어나고 싶어 안간힘을 쓰다가, 어디로든 탈출하고 싶어 여기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나는 살기 위해 이곳, 무용 수업에 왔다. 그런데 세상에, 몸으로 자기소개라니. 여기서도 스트레스를 받고 싶진 않은데. 등짝에 땀방울이 맺혀 티셔츠가 끈적끈적해졌다. 연습실 전면 거울 속 나는 어색한 얼굴로 아빠 다리를 하고 있었다. ’ 선생님, 그냥 가르쳐주면 안 될까요? 아무거나 좋아요. 그냥 움직이고 싶어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잠깐 화장실 다녀올게요, 하고 도망쳐버릴까? 첫 시간에 도망치면 수업료는 조금이라도 환불해주겠지?

선생님이 말했다.
“규칙 하나. 남의 춤에 웃지 말기. 주제는 ‘금요일 저녁’입니다.”


첫 번째 남자가 멋쩍은 얼굴로 일어나 살짝 쪼그려 앉아 가스불을 켜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몸짓을 설명했다. “저는 금요일 저녁에 먹는 라면을 좋아합니다. 참치캔을 딱 뜯어서 반찬으로 먹어요.” 그는 눈앞에 냄비가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상상 속 젓가락을 들어 상상 속 냄비에서 상상의 라면을 집어 올려 호호 불었다.


두 번째 여자도 일어나 제자리에서 마구 뛰다가 허공에 하트를 발사했다. “저는 금요일 저녁 친구들과 춤추러 가는 것을 좋아해요.” 선생님은 웃지 말라고 했지만, 그녀의 움직임에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내 차례가 왔다. 나무토막처럼 뻣뻣한 내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야 한다니. 아아. 금요일 밤에 뭘 한단 말이야. 누워서 쉬어야지. 지쳐서 쓰러져 자고 싶단 생각이 들었던 금요일들.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나는 바닥에 철퍼덕 엎드렸다. 으악. 이래도 되는 건가? 모르겠다. 이 사람들 앞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저는 누워 있어요.”

선생님이 말했다. “눕는 것도 춤이 될 수 있죠.”


정말 그런가? 나는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기분만 들었다. 뿌연 수증기로 꽉 찬 사우나에 갇힌 느낌, 이것이 내가 처음 현대무용을 접하고 느꼈던 불편함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점점 더 춤을 좋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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