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본 사람을 끌어안고

모르는 사람의 눈동자에 비친 나를 처음으로 보았다

by 노르키

3년 전, 무용 워크숍에 간 것은 우연이었다. 뭐라도 좋으니 퇴근하고 할 만한 무언가를 찾고 싶었다. 그즈음 나는 똑같은 판화를 365장씩 매년 찍어내듯 비슷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어느덧 직장 생활은 5년 차로 접어들던 때였다. 부모님은 그런 나를 보며 안심하는 듯했다. 얼핏 보면 나는 튼튼하고 안정적인 댐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 댐 밑바닥에는 미세한 틈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틈은 때로는 간밤에 꾸는 악몽으로 찾아왔고, 가끔씩은 나를 겁에 질리게 만드는 과호흡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나를 포함해 수강생은 서른 명 남짓이었다. 머리가 짧고 호리호리한 남자 선생님은 무용수들 사이에선 잘 알려진 사람이라고, 수강생 가운데 누군가가 말했다. 그러나 현대무용에 문외한이었던 나는 어쨌든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둥글게 둘러앉아 자기소개를 했다. 여기에 온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나처럼 처음 온 사람도 있었다. 무용 전공자, 배우, 직장인, 선생님, 한의사, 변호사, 취업준비생까지 저마다 다양했다. 다들 어떤 목적으로 여기에 왔을까? 끊임없이 목적을 찾는 것은 나의 오랜 습관이었다.


문득 불안해졌다. 갑자기 한 사람씩 일어나 춤춰보라고 선생님이 시키면 어쩌지?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나는 불안 반, 호기심 반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선생님은 모두를 일어서게 했다. 그리고 움직여보자고 말했다. "천천히 걸으세요." 우리는 선생님의 신호에 맞춰 연습실을 한 바퀴 천천히 돌았다. "조금 더 빨리. 더 빨리! 이제 뛰세요.” 그 말에 따라 모두가 빨리 걸었고 그러다 뛰었다. 조금씩 가슴과 배와 옆구리, 다리가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앞으로만 가지 말고 옆으로. 대각선으로! 마음대로 방향을 바꿔 보세요." 선생님의 말에 따라 나는 걷다가 뛰었다. 뒤로도 걸어 보았다. 이윽고 가장자리에서 벗어나 연습실 중심을 가로질러 뛰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3~4분쯤 뛰었던 것 같다. 선생님이 말했다. "멈추세요." 멈췄다. 이번에 선생님은 다른 지시를 내렸다. “옆사람을 바라보세요. 그리고 다가가세요.”


가장 가까운 자리에 어떤 남자가 있었다. 세 걸음 정도 떨어진 자리였다. 선생님은 옆사람에게 바짝 다가가 서라고 말했다. 내 얼굴과 옆 사람 얼굴 사이에 주먹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말이다. “꼭 끌어안아 주세요.” 이게 무용이랑 상관이 있나? 상관있는지 없는지를 묻는 것도 나의 오랜 습성이었다. 스튜디오 조명은 어두웠고 공기는 고요했다.


모르는 사람을 껴안기는 처음이었다. 솔직히 나는 모르는 사람과 스킨십하는 것을 꺼려했었다. 사람을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지금껏 프리허그 한 번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때만큼은 어둑한 스튜디오가 우주만큼 커다란 밤하늘로 느껴졌다. 가만히 멈춰 선 사람들은 꼭 별들 같았고, 그 사이에는 부드러운 은하수가 흐르는 기분이었다.


나는 생전 처음 본 남자의 얼굴을 아주 가까이에서 바라보았다. 연인도 아니고 썸 타는 사람도 아닌 남자 사람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충분히 가까운 것 같았는데도 선생님은 우리에게 더 가까워지라고 말했다. “더욱더 가까이, 더요” 이젠 나의 코와 그의 코 사이엔 주먹 한 개 겨우 들어갈 만큼 되었다. 숨은 어떻게 쉬어야 할지, 침은 언제 삼켜야 할지, 불안하고 초조해서 숨이 막혔다. 선생님이 다시 한번 말했다. “얼굴을 천천히 살펴보세요.”


상대방의 눈동자는 옅은 고동색이었다. 그 눈동자는 볼록거울 같았다. 그 속에 내 얼굴이 보였다. 모르는 사람의 볼록한 눈동자에 비친 나는 처음이었다. 내 얼굴이 보이자 숨이 조금씩 차분해졌다. 눈을 바라본 지 30초가 흐르고, 1분이 흐르고... 하지만 선생님은 그만두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눈썹과 눈썹 사이에 듬성듬성 난 눈썹 털, 모공, 쌍꺼풀, 코 옆에 난 점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의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편안하게 꼭 안으세요.” 상대는 나의 등을 감싸 안았다. 모르는 사람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팔뚝에서 뛰는 혈관 소리도 들렸다. 더욱 자세히 들으면 피가 흐르는 소리도 들렸을까? 내 몸보다 살짝 더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호흡하면서 오르락내리락 흔들리는 몸의 움직임이 들렸다. 그의 이름을 모르지만 동시에 그를 잘 안다는 느낌이 들었다. 회사에선 매일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는데도, 매일 보는 사람들과는 그런 느낌을 나눈 적이 없었다. 직장 동료들과는 서로 눈동자를 들여다볼 일도 없었다. 손을 잡을 일도 없었으며, 심지어 어깨라도 부딪히면 불에 덴 듯이 뒤로 물러나며 “죄송합니다.”라고 말했으니까.


수업이 끝나고 우린 다시 둥글게 둘러앉았다. 선생님은 감상을 물으며 이런 말을 덧붙였다. "재밌다는 말만은 빼주세요. 생각하지 않고도 쉽게 할 수 있는 말이잖아요." 안경 쓴 어떤 남자가 말했다. 회계사라고 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감정과 감각이 마비되잖아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야 상처를 받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오늘은 어릴 적에 느꼈던 감각이 깨어나는 기분이었어요.”


선생님도 말했다. “사실 저는 사람들을 만나는 걸 별로 안 좋아해요. 저 사람이 뒤통수를 때리면 어쩌지? 의심도 많은 편이고요. 그러면서 이런 걸 시키는 게 이상하지만, 서로를 바라보고 꼭 껴안는 여러분을 보니까 저도 치유되는 것 같았어요.”


울어본 지 오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 살 때 아빠 차를 타고 가족끼리 여의도에 불꽃놀이를 보러 갔는데 주차할 곳이 없어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오는 길 내내 창문을 치며 하도 서럽게 울어서 엄마는 아직도 그 얘기를 하며 웃었다. 스무 살 땐 좋아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머리를 감다가 울기도 했었다.


직장인이 되고 나서는 우는 일이 줄어들었다. 감정을 느끼지 않고,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감각이 마비되어야, 맨 정신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게 됐다. 무용 워크숍에서 처음 본 모르는 사람을 끌어안고서, 문득 슬픔이 퍼졌다. 울고 싶어졌다. 나를 인간답게 만들어주던 것들을 외면하며 살아왔다는 슬픔이었다. 어쩐지 초면의 그 사람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의 심장이 뛸 때마다 그 반동으로 내 몸도 조금씩 울려서였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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