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수 년 전 나를 배신한 친구가 떠올랐다.
“저렇게까지 친한 사이가 존재할 수 있어?”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를 보다가 남편에게 물었다. “어린 시절에 같이 목욕하는 건 그럴 수 있다 치자고. 그런데 가슴골도 보여달라니? 나는 살면서 그런 적 없는데?” 남편이 대답했다. “저건 영화일 뿐이잖아.”
주인공은 모범생인 칠월(마사순 분)과 자유분방한 안생(주동우 분)이다. 둘은 성격은 다르지만 단짝이다. 늘 붙어 다니고 깔깔거리며 같이 목욕도 한다. 그러나 칠월에게 남자친구가 생기면서 둘의 우정엔 금이 간다. 칠월의 남자친구가 안생을 좋아하게 됐기 때문이다.
영화를 본 뒤, 고등학교 동창 H에 관한 불쾌한 기억이 떠올랐다. 10년 전쯤의 일이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나는 H와 종종 만나곤 했었다. 우린 다른 대학에 다녔지만 가끔은 일부러 만나 같이 지하철을 탔다. 어느 해 봄엔 음악 축제에 놀러 가 꼴딱 밤을 새웠고, 언젠가는 일주일 동안 시골 마을을 여행하기도 했었다. 내가 왜 H를 좋아했을까? H에겐 나에겐 없는 서늘한 분위기가 흘렀다. 자주 시끄럽게 웃고 발을 동동 구르며 호들갑스럽던 나와는 정반대였다. 그래서 내 눈엔 H가 쿨해보였다.
당시에 나는 남자 사람 B와 교제하고 있었다. B와 헤어질까 말까 고민하던 차에 마치 옛날 유행가처럼 H와 연락이 뜸해졌다. H의 생일에 선물을 주려고 그녀에게 전화했었다. 그날도 H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며칠 뒤에야 H가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10초 정도 아무 말도 없었다. 처음 뗀 말은 “미안해”였다. H가 B와 사귀기 시작하면서 나와 연락을 끊었던 것이다.
H는 B가 뭐가 좋았을까나? 터지기 직전의 화농성 여드름이 꽃을 피우고 있었고, 입냄새가 심해서 위장병을 우려하게 만드는 녀석이었다. 나한텐 왜 만났냐고 묻지 말라. 나도 모르겠으니까.
오히려 상처가 됐던 것은 H의 언행이었다.
“너 같은 애랑 만나야 하는 B가 불쌍해."
"대학에 들어가서 예쁜 애들이랑 어울려 다니더니 네가 뭐라도 된 줄 알아?"
"네가 죽든지 말든지 나랑은 상관없어.”
그 뒤로 몇 번쯤 발신번호가 없는 문자 메시지가 왔다. 문자에는 저주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몇 달 뒤엔 그마저도 오지 않았다.
당시에는 H와 비슷한 특징을 갖고 있는 사람만 봐도 싫었다. 음침한 표정, 축 처진 입꼬리, 힘없는 눈동자, 이죽거리는 말투…. 내 머릿속에서 H는 사람 곁엔 절대 두어선 안될 불쾌한 배신자였다. 친구에게 저주의 말을 퍼붓는 살인미수범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것도 점점 잊혀갔다. 그 뒤로 몇 년 동안 새로운 친구, 새로운 동료, 새로운 인연들을 만나면서 신의와 존중을 배우고 나눌 수 있어서였다. 그래서 오래도록 H를 잊고 살았다.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를 보고 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사실 H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몰랐던 것 같아… 지금도 모르지.’
나는 H에게 진짜로 좋은 친구였을까? H를 훌륭한 친구라고 생각하긴 했었을까? 친구로서 좋아하긴 했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나는 H의 마음 깊은 곳을 진정으로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관심조차 없었다. H의 무표정하고 슬픈 얼굴을 보며 H를 쿨하고 괜찮은 아이라고 제멋대로 해석했다. 게다가 나는 사실 내가 H보다 모든 면에서 낫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친구로 지내면서 내가 그녀에게 싸구려 우월감을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까?
그 경험 이후로 나는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좋은 친구가 되는 법을 다시 배웠다. 30대가 된 지금, 그 시절을 되돌아본다. 나는 우정을 불신하지 않았다. 친구라고 불렀던 사람을 진짜로 좋아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았던 내가 부끄러웠을 뿐이다.
그때 카톡이 왔다. “뭐 해?” 대학에서 만나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는 아름 언니였다. 언니는 내게 우정의 즐거움을 알려준 사람이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연락하고 가끔씩은 휴대전화가 뜨끈뜨끈해질 만큼 오래 통화한다. 나는 언니에게 내 생각을 자유롭게 말해도 두렵지 않다. 언니도 내게 자신의 느낌들을 풍성하게 들려준다. 나는 언니가 왜 달걀과 타코를 좋아하는지 안다. 언니는 내가 정직한 사람들을 좋아한단 사실을 안다. 언니와는 어울리면 어울릴수록 즐겁다.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만 같다. 이런 기쁨은 나를 건강하게 살도록 만들어주는 원동력이다.
또 생각난 친구가 있다. 어릴 적 나는 소꿉친구 람보네 집에 자주 놀러 갔었다. (친구의 별명은 람보였다.) 람보는 또래 중에서도 키가 멀쑥하니 컸고 늘 쾌활하게 뛰어다니는 여자애였다. 람보네 집 마당엔 주황색 보트가 있었다. 군데군데 노란색 페인트가 벗겨진 그네도 있었다. 우린 여름이면 마당의 수돗가에 호스를 연결하고 보트에 물을 채워 물놀이를 했다. 7살 때, 우리는 여느 때처럼 홀딱 벗고 놀다가 서로 팔다리가 누가 더 긴지 재보았다. 우린 서로의 몸이 어떻게 생겼는지 들여다보다가 신기해서 소리 질렀다. “너 여기 밤하늘 같아, 우주 같아!” 그러고는 우린 다시 물놀이를 하러 갔다.
앞으로도 나는 H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를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지독한 경험 덕에 나는 좋은 친구가 되는 법을 배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