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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르키 Jul 21. 2022

안녕 나의 못된 소울메이트

10년 전 나를 배신했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떠올랐다.

5월 글쓰기 모임에선 서로에게 새로운 과제를 내줬다. 살면서 한 번도 안 봤을 영화를 보게 만드는 것이었다. 우린 각자 좋아하는 영화를 한 편씩 추천했다. 그리고 상대에게 추천할 영화는 사다리 타기로 랜덤 배정했다.


나는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를 보는 걸로 당첨됐다. 모임이 아니었다면 영영 볼 생각도 안 했을 것 같다. 이상하리만치 여태껏 여자들의 우정 얘기에는 관심이 들지 않았다.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를 보던 와중에도 의문이 생겨서 남편에게 물었다. “저렇게 화사한 우정이 가능하다고? 저렇게 친한 게 가능해? 어린 시절에 같이 목욕하는 건 그럴 수 있다 쳐. 가슴골도 보여달라니? 난 살면서 그런 적 없는데?” 남편이 간결히 대답했다. “저건 영화잖아.”


이 영화의 주인공인 칠월(마사순 분)과 안생(주동우 분)은 절친한 두 친구다. 둘은 늘 붙어 다니고 깔깔거리고 같이 밥 먹고 목욕도 한다. 그러나 어느 훈남의 등장으로 둘 사이엔 처음 균열이 생긴다. 안정적인 성향의 모범생 칠월, 끼 많고 자유분방한 안생. 남자의 마음은 매력 넘치는 안생에게 기우는 듯하다. 안생은 친구에게 사랑을 양보하려고 고향을 떠난다. 하지만 안생이 고향을 떠나던 날, 칠월은 안생의 목에 걸린 그 남자의 목걸이를 발견한다.


영화를 본 뒤, 잊고 지냈던 10년 전쯤의 불쾌한 기억이 떠올랐다. 대학생이었던 나는 여고 동창 A와 종종 만나곤 했었다. 다른 대학에 다니면서도 가끔씩은 일부러 만나 함께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서로 연애 상담을 해줬고, 함께 음악 축제에 놀러 갔고, 어느 해 여름에는 시골 마을을 여행하기도 했었다. 이만하면 친구 사이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A에겐 음울하고 냉소적인 분위기가 흘렀다. 자주 시끄럽게 웃고 호들갑스럽던 나와는 정반대였다. 그래서 내 눈엔 언뜻 A가 쿨해보였다.


당시에 나는 남자 사람 B를 만나고 있었다. B와 헤어질까 말까 고민하던 차에 마치 옛날 유행가처럼 A와 연락이 뜸해졌다. A의 생일은 빼빼로데이였다. 나는 그 애를 위한 빼빼로 바구니를 주려고 전화했었다. 그날도 A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바쁘겠거니 하고 말았겠지만, 이번엔 생일 선물이라도 건네려고 한 번 더 전화했었다. 마침내 A가 전화를 받았다. A는 10초 정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처음 뗀 말은 “미안해”였다. A가 당시 내 남자 친구였던 B와 사귀기 시작하면서 나와 연락을 끊었던 것이다. 나와 헤어지고 일주일 만에 사귀었으니 죽었다 깨어나도 바람은 아니라면서.


혹시 B가 꽤나 치명적인  오해라도 할까 봐 미리 말해둔다. B는 터지기 직전의 화농성 여드름들이 불타는 고구마처럼 얼굴을 장식한 여드름 보이였다. 게다가 구취가 심해서 위장병을 우려하게 만드는 녀석이었다. 왜 만났냐고 묻지 말라. 나도 모르겠으니까.


상처가 됐던 것은 친구라고 생각했던 A의 언행이었다. A는 나와 나눴던 연애 고민을 B에게 낱낱이 전달했다고 말했다. “너 같은 애랑 만나야 하는 B가 불쌍해.” “네가 했던 말들 걔한테 다 전해줬어.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어쩌라고. 걔는 내 말만 믿어.” “서울의 대학에 들어가서 예쁜 애들이랑 어울리더니 네가 뭐라도 된 줄 알아?” “네가 죽든지 말든지 나랑은 상관없어.” 그 뒤로 몇 번쯤 발신번호가 없는 문자 메시지가 왔다. 문자엔 대개 “죽어버려.” 같은 말들이 쓰여 있었다. 몇 달 뒤엔 그마저도 오지 않았다.


당시에는 A와 비슷한 특징을 갖고 있는 사람만 봐도 싫었다. 음침한 표정, 축 처진 입꼬리, 힘없는 눈동자, 이죽거리는 말투…. 내 머릿속에서 A는 사람 곁엔 절대 두어선 안될 불쾌한 배신자였고, 친구의 심장을 칼로 찌르며 저주의 말을 퍼붓는 X등급 살인자였다. 그 뒤로  내 컵엔 새로운 물들이 가득 채워졌다. 새로운 연인과 친구들과 직장과 새로운 생활이 생겼다. 그래서 오래도록 그들을 잊고 살았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그 시절 나는 A를 제대로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A에게 진짜로 좋은 친구였을까? A를 훌륭한 친구라고 생각하긴 했었을까? A를 친구로서 좋아하긴 했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나는 A의 마음 깊은 곳을 진정으로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A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며 내 멋대로 A를 쿨하고 괜찮은 아이라고 규정했었다. 그 애의 굳은 얼굴 아래에 이글거리는 기쁨과 슬픔, 분노, 증오 따위는 알려고 하지 않았었다. 게다가 내가 A보다 모든 면에서 낫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외모, 성격, 머리, 그 밖의 모든 것들도. 걔와 친구로 지내면서 내가 싸구려 우월감을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까? 그런 걸 진정한 친구라고 말할 순 없다.


그 이후로 나는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좋은 친구가 되는 법을 다시 배웠던 것 같다. 10여 년이 흐른 지금, 30대가 된 나는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를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우정 영화나 드라마에 관심이 없었던 게 아니다. 친구라고 불렀던 사람을 진짜로 좋아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았던 내가 부끄러웠을 뿐이다.


그때 카톡이 왔다. “뭐 해?” 대학에서 만나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는 아름 언니였다. 언니는 내게 우정의 즐거움을 알려준 사람이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연락하고 가끔씩은 휴대전화가 뜨끈뜨끈해질 만큼 오래 통화한다. 나는 언니에게 내 생각을 자유롭게 말해도 두렵지 않다. 언니도 내게 자신의 느낌들을 풍성하게 들려준다. 나는 언니가 왜 달걀과 타코를 좋아하는지 안다. 언니는 내가 정직한 사람들을 좋아한단 사실을 안다. 언니와는 어울리면 어울릴수록 즐겁다.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만 같다. 이런 기쁨은 나를 건강하게 살도록 만들어주는 원동력이다.


또 생각난 것이 있었다. 어릴 적 나는 소꿉친구 람보네 집에 자주 놀러 갔었다. (친구의 별명은 람보였다.) 람보는 또래 중에서도 키가 멀쑥하니 컸고 늘 쾌활하게 뛰어다니는 여자애였다. 람보네 집 마당엔 주황색 보트가 있었다. 군데군데 노란색 페인트가 벗겨진 그네도 있었다. 우린 여름이면 마당의 수돗가에 호스를 연결하고 보트에 물을 채워 물놀이를 했다. 7살 때, 우리는 여느 때처럼 홀딱 벗고 놀다가 서로 팔다리가 누가 더 긴지 재보았다. 우린 서로의 몸이 어떻게 생겼는지 들여다보다가 신기해서 소리 질렀다. 너 여기 밤하늘 같아, 우주 같아! 그러고는 다시 물놀이를 하러 갔었다.  


못된 친구 덕분에 알게 된 가르침들.

어쩌면 그녀는 못됐다는 말만으론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하고 풍요로운 자기만의 세계를 지니고 있을 테고, (믈론 내가 그걸 애써 알 일은 없겠지만.) 나는 누군가의 좋은 친구가 되는 법을 배워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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