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도 괜찮다는 남편, 일하고 싶은 나

임신 24주, 일에 몰두하고 싶다. 과거의 기억이 미화됐나 봐.

by 노르키


“아기 낳고 몸 추스르면 일하고 싶어.”

임신 24주 차. 요즘 나는 종종 남편에게 다시 일하고 싶다고 말한다.

지금처럼 프리랜서로 일하는 것도 좋다. 동시에 다시 예전처럼 회사에 소속돼 일하고 싶은 마음도 든다.

다니던 동안에는 나름의 고충도 많았고, 어서 퇴사해 자유를 누리고 싶었었는데.

어쩌면 나는 소속감에 안정을 느끼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가고 싶은 회사도 생겼다.


나와 입사 동기였던 남편이 이직을 거쳐 회사에서 커리어를 쌓아가는 모습을 보면 나도 자극을 받는다.

엊그제 남편은 회사에서 팀 발표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남편은 며칠 동안 긴장하며 열심히 발표를 준비했다. 내 앞에서 리허설까지 하면서. 나는 그 연습 장면을 영상으로 찍어놓았다.

남편이 일을 마친 뒤, 내게도 남편의 기쁨과 성취감이 전해졌다.

학창 시절엔 모의고사 날에도 긴장에서 배가 살살 아팠다던 남편. 그만큼 잘하고 싶어 하고 열심히 하는 덕에, 이 사람은 종종 자기 스스로에게 뿌듯한 결과를 얻는다.


나 역시 그런 짜릿함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다.

대학생 때, 친구들과 함께 토론대회에 나가 1등 상을 탄 적이 있었다.

연습하던 2주 내내 설렜었고, 긍정적인 긴장감이 우리를 휩싸고 있었다.

그렇게 몰입한 경험이 그게 마지막이어선 곤란하다.


난 그렇게 계획적인 사람이 아닌데도, (무계획이어도 별로 스트레스받지 않는다.)

스케줄 다이어리에 써놓은 계획을 하나씩 지워갈 때 쾌감을 느낀다.

이젠 다이어리에는 집안일에 관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파스타 해 먹기

산후조리원 상담 전화하기

부동산 연락하기

전화영어

배 깎아먹기.

글쓰기.


한편 남편은 내 의사를 존중해 준다.

내 뜻대로 하면 된다고, 심지어는 일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다.

“일 안 해도 돼. 네가 행복하면 돼. 일해도 좋고 프리랜서로 해도 좋고, 뭐든 괜찮아.

출산 전까지는 편하게 쉬면서 놀아. 책이랑 영화도 보고, 글도 쓰고, 음악도 듣고. 하고 싶었던 것들 마음껏 해.

그럴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 참 좋잖아.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알아가면 돼.”

남편의 그 말이 참 든든하고 고마웠다.


하지만 내가 계속 일하고 싶다고 말하자,

남편도 이젠 내가 일을 하면 좋겠다고 얘기한다.

오늘 아침에 남편과 시리얼, 레몬잼을 바른 토스트, 땅콩과 호두를 먹었다. 먹으면서 남편이 내게 말하길.

“나중에 네가 일하면 좋겠어. 그럼 회사에서 일하게 되면, 비위 맞추는 일 말고, 지적하는 일을 하면 좋겠어.”

비위 맞춘다는 것이 표현이 좀 그럴 뿐이지, 나쁜 의미가 아니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내가 원치 않는 상황에서 불편한 상대의 기분 맞춰주는 일에는 소질이 없다.

그러나 회사에선 해야 하는 일이다.

남편이 말했다.

“나는 남들의 기분 맞추는 것, 싫지 않거든. 그런데 너는 그렇게 하면 행복하지 않으니까.”


한편으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느 장소와 상황에 있든, 자기의 태도는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서비스 직에 종사해도 주인의 태도로서 질 높은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사람이 있고,

회사 대표여도 매사에 전전긍긍, 비굴한 태도를 지닌 사람도 있는 법이다.

“어느 곳에서 일하든 비위 맞추듯 일하는 사람도 있고, 자기가 주인처럼 일하는 사람도 있어.

대행사에서 일해도 주인처럼 일하는 사람도 있고, 기자나 시사교양 pd여도 회사 눈치 보고 비위 맞추며 일하는 사람도 있는 거야.”

남편이 대답했다. “그렇네. 우문현답이다.”

고마운 남편. 내 기분을 잘 살펴주고, 내 기분이 좋도록 내게 늘 긍정적인 말을 해준다.


직장생활을 하던 내게 이렇게 조언해주던 사람이 또 있었다. 바로 우리 엄마.

“상황이 어떻든, 너의 태도가 모든 걸 결정하는 거야.

네가 당당하고 즐겁게 일하면 너에게 새로운 기회가 오는 거야.”

하지만 직장생활이 고단하게 느껴졌던 내 귀에는 엄마의 조언이 들리지 않았다.

“이 상황이 부당하고 싫은데 어떻게 좋은 척해? 그건 자기기만이야.”

그 일을, 그 상황을 좋아해 보려고 애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몇 년 동안 아침마다 비참한 기분을 떨치지 못했다.


퇴사에 후회는 없다. 몸과 마음이 서서히 회복되는 게 느껴졌다.

‘뭘 먹지?’ ‘무슨 영화 볼까?’ 생각하는 아침이 즐겁다.


어제도 남편에게 말했다.

“나 요즘 행복해. 이렇게 뱃속 아기와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고, 맛있는 것 먹고, 좋은 것 보러 다니고. 이렇게 호강한 적이 없어.

하지만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랑은 다른 거야.

내게는 그 성취감도 필요해.

그래서 반드시 글을 쓰고 일을 할 거야.”


남편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하고 싶은 거 하면 돼.

하지만 뭐든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은 없어.”


다시 일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전념할 수 있는 일.

나 자신에게 자랑스럽고 뿌듯한 일.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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