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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르키 Mar 16. 2023

키키 스미스 전시에서 '황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다

늑대 배를 뚫고 태어나는 여인. 사실 여인과 늑대는 하나가 아닐까? 


지난주 토요일 오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키키 스미스 전시를 보고 왔다. 전시가 끝나기 하루 전날이었다. 50명쯤이 입장 대기하고 있었다.  


키키 스미스의 '황홀'(2001) 

기억에 남는 작품은 '황홀(Rapture)'이었다. 작품 설명을 보면 작가는 ‘빨간 망토’ 우화에서 이를 착안했다. 동화에선 사냥꾼이 외부에서 늑대 배를 가른 덕분에 빨간 망토 소녀가 탈출할 수 있었다. 키키 스미스의 이 작품에선 성인 여성이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늑대 배를 뚫고 나온다.


나는 이렇게 해석해 봤다. 여성과 늑대는 사실은 친구가 아닐까? 작품 속 여성이 늑대의 손을 잡은 듯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고개를 뒤로 젖힌 늑대의 표정은 고통스러워 보이지도 않았다. 어쩌면 배가 찢어진 늑대와 배를 뚫고 나온 여성은 적대 관계가 아니라 우호 관계인지도 모른다. 또는 늑대와 여성은 사실 하나일 수도 있다. 늑대인 여자가 여자인 늑대를 낳고, 여자인 늑대가 늑대인 여자를 낳는다... 이 늑대 여인은 새로 태어나기 위해 자기 배를 가르고 자기 안의 당당한 여신을 밖으로 꺼내놓은 것처럼 보였다. 번데기에서 탈피하는 모습 같았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의 머리를 뚫고 무장을 한 채 성인 여성으로 태어난 아테네도 떠올랐다.


'rapture'는 황홀감을 뜻한다. '사람을 다른 장소나 존재의 영역으로 옮기다'라는 뜻이기도 하다. 종교적인 의미도 있다. 종교적 깨달음으로 인한 법열, 또는 예수가 재림할 때 구원받는 사람을 들어 올리는 '휴거'란 뜻도 있다. joy, delight, ecstacy가 아닌 rapture가 작품명인 이유는,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다른 것으로 탈바꿈할 만큼 강렬한 체험이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본다. 단순한 쾌락이 아니라 종교적 체험에 가까운 황홀경을, 단 한순간이라도 느끼고 싶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인스타그램과 유튜브엔 다양한 강의가 범람한다. 1년 만에 10억 부자 되는 법, 망하지 않는 법, 대인관계 잘하는 법 등. 그런 것이 지금 여기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을 대변해 줄 순 있겠지만, 나는 그것만으로는 살 수 없다. 나를 안전하게 보호해 준 늑대의 배를 가르고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 나는 그런 황홀한 순간을 만나기를 기다린다. 


키키 스미스의 '메두사'(2003)

'메두사' 동상 앞에 선 순간도 떠오른다. 신화에서 메두사는 아름답고 잔혹하고 눈만 마주쳐도 상대를 돌로 만들어버리는 무시무시한 마녀다. 하지만 키키 스미스의 메두사는 나처럼 평범한 사람이었다. 나와 키가 비슷했다. 가슴과 엉덩이는 조금씩 중력에 끌려내려 가 처지고 있었다. 뱀으로 이뤄진 머리카락도 없었다. 일하고 먹고 걸어 다니고, 자기 몸으로 살아가는 나와 같은 여자였다.  


앞을 쏘아보듯 응시하는 눈은 연약하지 않았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얼굴과 몸매로 남자를 홀리는 무섭고 신비로운 존재가 아니다. 슬픔에 빠진 이들을 인내하며 구원해 주는 성녀도 아니다. 그저 지상의 모든 여인들처럼 땅을 밟고 중력의 영향을 받는 자연스러운 인간. 신화의 메두사가 실제로 이런 모습이라면, 나는 메두사를 꼭 끌어안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뭐라고 말했으려나. "같이 차 한 잔 마실래? 아니면 글 쓰러 갈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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