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 지나도 듣고 싶은 노래, 기억하고 싶은 순간
스물한 살 방학. 집에만 있어서 겨울이었는지 여름이었는지 기억이 또렷하지 않다. 대학 생활은 생각보다 지루했다. 이렇게 심심하게 3년을 더 보내야 하나? 재밌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 뭘 해야 할 지도 막막했다. 그날도 집에서 멍하니 TV를 보고 있었다. MBC에서 소프라노 신영옥이 두 곡을 불렀다. All the things you are와 Over the rainbow였다. 무대 배경은 검은 장막, 별처럼 반짝이던 조명들, 드레스를 입은 채 활짝 웃으며 노래하던 성악가. 그전까진 신영옥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노래를 들으면서, 내가 스스로 드리워 놓았던 내 인생의 어두운 커튼이 걷히는 느낌이었다.
지금도 첫 소절을 들으면 그 기분이 되살아난다. 앞으로 내 삶이 햇볕 드는 곳으로 향할 것만 같았다.
You are the promised kiss of springtime
That makes the lonely winter seem long
몇 주 전부터 요즘은 아침저녁마다 KBS 클래식 fm을 틀어둔다. 오늘 아침에는 시리얼과 달걀 반숙, 배홍동 비빔면을 먹으면서 음악을 들었다. 먹고 나니 솔솔 잠이 왔다. 어느새 남편은 엎드려 책을 읽고 있었다. 저러다 책을 떨구고 금세 잠들 것 같았다. 나도 남편 옆에 누웠다. 라디오에선 시에 노래를 붙인 가곡이 나왔다. 노랫말은 질문과 답변으로 이뤄져 있었다. 그래서 귀를 기울여 듣게 됐다. 테너 진성원이 부르는 '내 마음이 가는 길'이었다. 얼굴 위로 햇볕이 내려왔다.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남편은 잠들어 있었다. 남편 옆모습은 입체초음파에 찍힌 아기 옆얼굴과 판박이였다. 10년쯤 뒤에도 이 노래를 듣는다면, 이 순간이 떠오르면 좋겠다.
아기와 하나로 연결된 기분이 좋다. 이제 29주 6일이 됐다. 키가 커졌나 보다. 배꼽 근처에서 꼼지락거리던 움직임이 양 옆구리에서도 느껴진다. 임신하기 전까지 최근 몇 년 동안은 빠른 박자의 힙합이나 대중가요를 즐겨 들었다. 이젠 고운 우리말이 담긴 노래를 찾아 듣게 된다. 노래의 힘은 놀랍다. 노래가 없었더라면 평소처럼 스쳐 지나갔을 순간이 내 마음 어딘가의 보석상자에 저장된다. 열 때마다 그 순간이 생생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