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권 읽기는 어려우니까, 1권을 정성껏 읽고 감동받자!
12월 31일부터 1월 1일까지 인스타그램에 새해 다짐 게시물이 잔뜩 올라왔다. 사람들은 일출과 등산 사진을 올리면서, 자기 새해 결심을 차분하거나 떠들썩하게 공표했다. 나는 그 대열에 동참하지 않으려고 잠자코 있었다. 어쩐지 남에게 나 자신이 우아하고 건실해 보여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들어서. 그랬으면 뭐라도 하지. 1월 1일엔 온종일 핸드폰 게임만 하다가 보내버렸다. 3가지 똑같은 과일 그림을 끄집어내면 명랑한 팡팡 소리가 나는 게임이었다. 모든 과일을 없애면 그 판에서 승리한다. 망할 과일 게임. 하루 만에 레벨 1에서 시작해 70까지 깨버렸다. 눈앞이 흐리고 피곤했다. 책장에 꽂힌 책들의 작가 이름이 안 보이는 기분이었다. 평소엔 게임을 즐기지도 않는 내가 그런 하루를 보냈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들었다. 크래프톤, 넥슨, 페이커란 단어와 가장 멀리 떨어져 살아왔던 내가. 이러려고 내가? (퇴사하고 글 쓰고 자유롭게 살아보겠다고 한 게 아닌데.)
새해 전날엔 먹은 걸 다 토해버렸다. 집 앞에서 3번, 집에서 5번…. 12월 30일 오후엔 친구네 집에서 친구의 자식 자랑을 들으며 기름진 짜장면과 탕수육을 잔뜩 먹었다. 31일엔 엄마와 백화점 지하 1층에서 스타먹스 초콜릿케이크와 돈가스와 돌솥비빔밥을 연달아 먹어버렸다. 그러다 31일 밤엔 잠도 못 자고 8번에 걸쳐 모든 걸 게워내고 말았다. 구토하기 전에 차마 화장실 문을 닫을 시간도 없었다. (아빠는 나를 보며 “병원에 데려가야 하는 거 아니야?”라고 말했다.) 생전 없던 입덧이 19주 만에 드디어 찾아온 걸까? 돈가스가 문제였나? 으악. 사이드로 나온 덜 익은 마카로니? 짜장면? 아니면 친구의 장밋빛 인생 자랑? 아니면 이 모든 게 종합적으로 문제였나? 어쨌든 나는 너덜너덜한 몸으로 1월 1일을 맞이했다. 그래도 364일 분량의 햇빛과 바다와 산들바람이 남았어. 그러니까 포기하지 말자. 액땜이야. 해묵은 것들은 다 게워냈다. 그러니까 나도 말끔한 정신으로 계획을 세워보자고!
1월 2일 아침, 핸드폰을 열어 메모장에 새해 다짐을 적어놓으려 했다. 그런데 또다시 과일 게임에 손이 가버렸다. 바나나 3개, 수박 3개, 산딸기 3개…. 눈이 따끔거릴 때쯤 내 레벨은 147이 됐다. 어제 아이폰 스크린 타임엔 핸드폰 사용 시간이 10시간으로 떴다. 이럴 순 없어!!!
1월 3일 낮, 오늘은 글을 쓰려고 서울 삼청동 카페에 왔다. 글쓰기 모임 회원들과 함께! 과일 게임은 안녕!
아이패드를 열어 나의 첫 번째 새해 다짐을 적어본다.
한 권을 읽어도 정성껏 읽는다.
‘3개월 동안 책 100권 읽고 20억 부자 됐어요.’ 요즘은 이런 음흉한 장삿꾼들이 판친다.
나는 몇십억 부자 되려고 책 읽으려는 게 아니다. 조금만 기름칠을 해주면 더 잘 돌아갈 머리, 썩이지 말고 지적으로 굴려봐야겠다.
중고등학생 때는 하루종일 책만 읽는 게 소원이었을 만큼 책을 좋아했었다. 중학생 때 나는 <라테란의 전설>이란 유럽 작가의 소설을 몇 번씩 읽었다. 중세시대가 배경이었다. 평민 여자가 교황이 되고, 훤칠하다고 묘사되는 귀족 남자와 진실한 사랑에 빠지는 내용이었다. 그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짜릿한 기분을 잊지 못해 나는 오랫동안 책을 좋아해 왔다. 19살 설날에는 큰집에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읽다가 새벽이 하얗게 밝아오기도 했다. 나는 주인공의 상황과 감정에 깊이 이입했다. 그래서 대학생이 되어서도 종종 저녁까지 학교 도서관 소파에 앉아 여성이 주인공인 소설을 읽었다. 아인 랜드의 <아틀라스>도 그때 읽었다.
나는 스스로 글을 잘 읽고 잘 이해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수능시험을 봤을 땐 언어영역 1등급이 나왔다. 대학입학 논술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비싼 돈을 들여본 적도 없었다. 그래도 종종 논술대회나 백일장에서 상을 받았다. 졸업 후엔 잡지와 기업 에디터로 일했다. 그래서 내가 노력 없이도 글을 잘 읽고 쓰는 사람인 줄 착각하며 살았다. 응당 잘 써야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라든가, 책이 내게 줬던 즐거움과 몰입감을 까맣게 잊고 이었다.
이제 새해엔 읽은 권 수에 집착하기보단, 읽는 방식을 바꿔보려 한다.
첫째, 마음에 드는 책을 고른다.
둘째, 고른 책을 정성껏 읽어내려간다.
셋째, 내 마음을 울리는 구절을 발견하면 내가 좋아하는 색깔펜으로 밑줄 긋는다.
넷째, 다 읽으면, 밑줄 그은 부분만 모아 필기앱에 정리해 둔다.
다섯째, 책에서 내 마음에 가장 와닿은 깨달음과 내가 미처 몰랐던 사실을, 내 생활에 적용해 본다.
여섯째, 내 삶에 적용하는 과정을 글 한 편으로 정리해 본다.
여섯째, 그런 감동이나 울림이 없었다면? 그럼 한 권 잘 읽었네~ 하고 쿨하게 다른 책으로 옮겨간다.
올해에는 나와 주파수가 잘 맞는 책을 한 권이라도 만나, 내가 아주 조금이라도 달라지는 게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