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여섯 아기 엄마, 다시 피아노에 도전하다.
2024년 3월 22일. 점심시간에 들른 동네 브런치 카페 입구에 피아노가 있었다. 밝은 마호가니 색상의 가정용 피아노였다. 뚜껑 위의 마샬 스피커에선 이름 모르는 시끄러운 팝송이 흘러나왔다. 그 옆엔 메모가 붙어 있었다. '다른 고객이 없을 땐 쳐도 됩니다.' 남편은 내 등을 떠밀었고 나는 어색하게 피아노 앞에 앉았다. 건반 촉감이 마음에 들었다. 조율이 된 피아노였다. 언제였더라? 마지막으로 피아노를 친 게? 8년 전쯤 구 남자 친구이자 지금의 남편을 위해 피아노를 친 적이 있었다. 영화 <러브 어페어(Love Affair)>(1995)의 OST를 쳤던 것 같다. 그때까진 엔니오 모리꼬네의 아름다운 이 곡을 악보를 보면서 칠 수 있었다.
카페 악보대엔 때 묻은 <라라랜드> 악보집이 펼쳐져 있었다. 악보집의 첫 곡은 영화의 시작에 나오던 'Another day of sun'이었다. 미국 LA의 꽉 막힌 고속도로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에 맞춰 춤추고 노래한다. 지금껏 지인들의 결혼식에서도 신부 신랑의 행진곡으로 일곱 번쯤 들었으니, 이 노래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어디에 강약을 줘야 할지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뭔가 좀 안다고 생각할 때가 사실은 아무것도 모를 때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악보대로 그대로 치기도 쉽지 않았다. 낮은음자리표의 저것이 '도'인지 '라'인지도 헷갈렸다. 간신히 더듬거리다가 "못하겠어!" 하고는 자리에 돌아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피아노 치고 싶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피아노를 쳤던 어릴 적이 떠올랐다. 나는 7살 때부터 13살까지 동네 피아노학원에 다녔다. 형편없는 학원이었다. 20대 후반이었던 원장 선생님은 늘 피곤한 얼굴이었다. 어린 수강생들이 자기 아기를 돌봐주면 그제야 살짝 웃어 보였던 늘 노곤했던 선생님... 어쨌든 그곳에서 주입식으로 체르니 40번의 중간까지 배웠다. 피아노를 치다가 문 열고 학원 앞에서 한발 뛰기를 하고, 다시 들어와 피아노를 쳐도 혼내는 사람이 없었다. 선생님은 공평하게 아무에게도 콩쿠르를 준비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부담 없이 즐기기만 했다. 중학교에 들어가기 직전 피아노학원을 마무리했다. 그렇게 내 인생은 피아노와는 멀어지는 듯했다.
그래도 피아노와 나 사이의 연약한 실은 끊어지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도 아주 가끔씩 피아노를 칠 기회가 생겼다. 나는 우리 학교 관현악 동아리 '오퍼스(Opus)'에 들어갔다. 동아리원은 연습을 위해 자유롭게 음악실에 출입할 수 있었다. 음악실엔 세상에서 가장 편한 머스터드색 낡은 인조가죽 소파가 있었다. 나는 찢어진 소파 위에 철퍼덕 누워 다른 애들이 수다 떠는 걸 구경하거나 악보집을 뒤적거렸다. 내 또 다른 행운은 내 친구가 첼로를 잘 켰다는 사실이다. 우린 청소 시간에 피아노 덮개를 열고 첼로를 꺼내왔다. 즉흥연주자 흉내를 내면서 피아졸라의 리베르탱고를 연주했다. 나는 종종 신입생 환영회 같은 학교 행사에 동원돼 피아노 반주를 맡았다. 겨울방학 동아리 연주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진짜, 다시 피아노 치고 싶어.'
'그런데 내가 지금 피아노 칠 때인가?'
서른여섯, 황소자리, 프리랜스 에디터, 주부, 10개월 아기 엄마, 돌잔치를 준비하는 '돌준맘'.
내 앞에 붙은 수식어를 보면 가끔은 비현실적이다. 이런 내게 피아노는 사치스러운 취미처럼 느껴진다. 누군가가 내게 엄마의 자격을 물으면 뭐라고 말하지? 돈 되는 걸 해야 하거나,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압박을 느낀다. 아기를 돌볼 시간을 쪼개 피아노를 한다니... 차라리 프로젝트를 하나 더 받거나 기사 몇 편을 더 써야 하는지도 모른다.
가끔씩 머릿속은 불안으로 뿌예진다. 미뤄놓은 일들은 3, 4월 달력에 어지러이 적혀 있었다. 내 컸던 포부와 야심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하기 싫은 일들로 채워진 일정표 사이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 같다. 지난 일 년 동안은 출산과 돌봄으로 녹초가 됐다. 집에선 사계절 내내 똑같은 수유 내복을 입었고, 자유시간이나 취미 생활이란 사치였다. 그나마 쥐어짜 내 확보한 자유시간엔 경력을 이어가기 위한 일을 하거나 밀린 잠을 자야 했다. '나'는 사라졌다. 내가 좋아했던 것들도 희미해졌다. 비행기표, 온천, 바닷가, 히말라야, 카페, 책, 영화... 이제 그런 걸 가까이하려면 연간 계획표에 적어둬야 한다.
‘그거 배워서 어디에 쓸 건데?’ 누군가가 물어도 할 말이 없다. 콩쿠르에 나갈 것도 아니고, 음악 치료사가 되기 위해 대학원에 갈 것도 아니고, 유튜버가 되어 부수입을 늘리려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그럴싸한 것들이지만, 지금 이 순간은 뭘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피아노를 치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아이를 남편에게 맡겨두고 홀린 듯이 집 주변의 동네 피아노 학원에 갔다.
+ 다음 화에선 피아노 학원에 방문해 곡을 고르는 이야기를 써볼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