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혹은 투자를 받고자 하는 기업에게 벤처캐피탈은 영원히 어려운 상대입니다. 극소수의 뛰어난 기업을 제외한 대다수의 기업들은 투자가 필요한데도 받지 못하거나 몇 달동안 여러 벤처캐피탈을 전전하며 까이고 자존심이 뭉개지고서야 겨우 투자를 받기도 합니다. 이건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이미 유니콘이 된 우버나 에어비앤비 같은 스타트업들도 그넓은 미국 대륙을 누비며 수 십개의 벤처캐피탈에게 까인 후에야 투자를 받았으니 어쩌면 대한민국 스타트업은 땅이 좁은 나라에 태어난 걸 감사해야 할 지도 모르죠. 대기업과 협력(하청)업체 관계를 표현하는 '갑-을'의 개념을 스타트업과 벤처캐피탈의 관계에 적용해도 금새 이해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벤처캐피탈도 말 못할 고민이 있습니다. 벤처캐피탈이 금융업이냐 육성업이냐 근본적인 화두를 던지는 분들도 있지만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벤처캐피탈은 금융업입니다. 벤처캐피탈이 뉴스에 나오는 경우는 대개 두 가지인데, 투자펀드를 결성했을 때와 성공적인 투자를 했을 때입니다. 특정 기업에 투자를 했는데 불과 2~3년 만에 수익률 1000%(10배)를 기록했다느니 하는 환상적인 내용들이 가끔 언급되기도 합니다. 그런 연유로 벤처캐피탈의 수익모델은 성공적인 엑싯(exit)을 통한 자금 회수일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벤처캐피탈이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구조는 대부분 같습니다. 먼저 펀드를 만들어야 하죠. 예를 들어 100억 규모의 창업초기펀드를 조성하고자 한다면 벤처캐피탈은 펀드에 투자할 출자자를 모집해야 합니다. 펀드에 출자하는 투자자를 일반적으로 LP(Limited Partner)라고 부릅니다. 벤처 펀드의 주요 LP들은 일반적으로 정부자금이거나 국민연금, 군인공제회, 우정사업본부 같은 주요 연기금들입니다. 국내에 조성된 대부분의 벤처 펀드 LP 50% 이상은 사실상 정부의 통제를 받는 자금들이죠. 일반적으로는 펀드의 50%지만 출자자를 구하기 어려운 펀드의 경우 80%까지 정부가 출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약 100억 규모의 펀드를 결성한다면 80억을 정부가 대고 펀드를 결성하고자 하는 벤처캐피탈이 10억을 내고 제3의 출자자에게 10억만 받아온다면 펀드가 결성되는 것입니다.
요즘은 벤처 펀드 결성이 어렵습니다. LP 모으기가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벤처캐피탈 대표나 펀드레이징 담당 임원이 매일 모태펀드나 연기금에 가서 줄을 선다는 얘기가 나오는 겁니다. 높은 투자수익률을 기록하는 극소수의 벤처캐피탈에는 거꾸로 LP들이 서로 돈을 주려고 줄을 서지만 대부분의 벤처캐피탈은 수익률이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에 펀드 출자금을 모으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녀야 하죠. 그런 면에서는 벤처캐피탈이나 스타트업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벤처캐피탈이 펀드를 많이 결성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투자를 많이 하기 위해서?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먹고 살기 위해서'입니다. 기본적으로 투자라는 게 방금 투자했다고 몇 달 후에 뚝딱하고 수익이 나는 게 아니고 심지어 수익이 날 지 안 날지도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벤처캐피탈도 먹고 살려면 기본적인 수입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 기본 수입이 바로 운영 보수, 즉 매니지먼트피(management fee)입니다. 펀드가 결성되면 LP들은 그 펀드 운영주체인 벤처캐피탈에게 운영 보수를 주게 됩니다. 투자수익을 내야하니 좋은 투자처를 발굴하기 위해 발품을 팔아야할 사람들(투자심사역)에게 월급, 식비, 교통비를 주는 것이죠. 예를 들면 A라는 벤처캐피탈이 100억 규모 벤처펀드를 결성하고 그 펀드의 운용기간이 5년, 운영보수가 1%로 정해졌다면 A는 5년동안 매년 1%인 1억을 운영보수로 받게 됩니다.
그런데 A의 임직원이 5명이고 몸값들이 높을 테니 연봉 합계가 3억, 좋은 사무실을 써야할 테니 연간 사무실 임대료가 1억이라면 매년 고정비로 총 4억이 발생하겠죠. 만약 A가 100억 규모의 펀드 하나만을 가지고 있다면 연간 실질 운영비가 1억에 불과하므로 기본적으로 매년 3억원의 적자가 발생합니다. 회사의 설립자본금을 까먹으면서 버틴다 하더라도 매년 수억원의 적자가 발생한다면 그리 오래지 않아 자본잠식이 되고 문을 닫게 될 겁니다. 실제로 그렇게 문을 닫은 벤처캐피탈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동안 대한민국에서 설립된 벤처캐피탈이 수 백개인데도 실제로 활동하는 벤처캐피탈이 그 수의 10% 정도에 불과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A는 BEP(손익분기점) 도달을 위해 어떻게든 펀드를 400억까지 모아야 합니다. 벤처캐피탈의 우선순위 1번은 투자가 아니라 펀드 결성입니다. 기본적으로 먹고 살아야하니까요. 역시 스타트업이나 벤처캐피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는 운영보수를 3%까지 주는 호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1~1.5%의 운영보수를 지급하고 심지어 운영보수가 까이기도 합니다. 모든 펀드가 펀드 운영기간에 따라 매년 투자해야 하는 의무비율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100억 규모 펀드의 운영기간이 5년인데 초기 1년차에 30억, 2년차에 30억, 3년차와 4년차에 각각 20억, 이렇게 배분되는 식이죠. 만약 1년차 투자금 30억을 다 투자하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페널티로 운영보수를 삭감당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1년 내내 투자를 하지 못하다가 막판에 몰려서 함량 미달인 업체에 어쩔 수 없이 투자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투자를 받아야하는 업체가 만약 이런 타이밍을 잡는다면 말 그대로 '횡재'하는 거죠. 그 타이밍을 기업이 알기가 쉽지는 않겠지만요.
투자가 실패해도 운영보수를 삭감당할 수 있습니다. 투자를 잘못했으니 결과에 책임지라는 논리인데 바로 이런 이유때문에 '벤처'캐피탈이 '벤처'투자를 하지 못하는 모순이 만들어집니다. 과감한 리스크 테이킹이 벤처 투자의 본질인데 투자한 회사가 망했으니 투자에 책임을 지라는 겁니다. 그렇게 대한민국 벤처캐피탈의 투자기준이 '돈 안 까먹을 회사' '망하지 않을 회사'가 되어버렸습니다. 벤처 투자는 기본적으로 10개 기업에 투자하면 8~9개의 투자가 실패하고 1~2개 기업이 성공해서 나머지 투자금까지 만회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대한민국 벤처캐피탈의 투자성공률은 50% 이상입니다. 왜 그러겠어요? 투자를 잘 해서? 투자 후에 지원을 잘 해줘서? 대부분의 대한민국 벤처캐피탈이 투자 후에는 거의 하는 역할이 없고 사후관리라는 명목으로 실적이 예상대로 안 나면 쪼으는 일만 하는데요? 처음부터 망하지 않는, 돈 까먹지 않을, 심한 경우에는 돈이 필요없는 회사에 돈을 얹어주는 방식으로 투자하기 때문입니다. 벤처캐피탈을 뭐라고 할 일이 아닙니다. 창조경제를 얘기하고 청년창업을 독려하는 정부가 실제로는 벤처투자를 못하게 했기 때문이니까요. 그런 면에서 정부 자금에 의지하지 않는 본엔젤스 같은 독립 벤처캐피탈이 등장한 것은 환호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부가 전혀 관여하지 않고 성공한 기업과 개인들이 펀드를 결성하여 후배 스타트업을 지원하는 것이니 선구안과 전문성이 높을 수 밖에 없습니다.
자, 그러면 이런 험난한 과정을 거쳐 펀드를 결성한 벤처캐피탈이 다음 단계로 할 일은 당연히 좋은 투자처를 발굴하는 일일 겁니다. 그게 벤처든 아니든 어쨌든 펀드에 수익을 내줄 수 있는 회사를 찾아야할 테니까요. 그런데 여기서 스타트업과 벤처캐피탈의 성향이 갈립니다. 좋은 투자처를 발굴하기 위해서는 많이 공부하고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발품 팔며 부지런히 다녀야하는데, 안타깝게도 대한민국 대부분의 벤처캐피탈리스트는 게으릅니다.
지방에 내려가 조금만 발품을 팔아도 알짜 회사들이 수두룩하고 정작 그 회사들은 상장도 하고 싶고 투자도 받고 싶은데 자본시장에 연결할 방법을 모릅니다. 좋은 투자처를 발굴해야 먹고 사는 업인데도 정작 발품을 팔지 않고 좋은 투자처가 알아서 굴러들어오기를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게 안타깝게도 대한민국 벤처캐피탈리스트의 현주소입니다. 심지어 벤처캐피탈 홈페이지에 투자요청 서류를 등록해도 쳐다도 보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소수의 벤처캐피탈리스트만 업체 발굴을 위해 지방 출장을 서슴지 않고 고급 정보를 얻기 위해 전문가를 만나고 정보를 획득합니다. 대부분의 벤처캐피탈리스트는 이 소수의 근면한 개미에게서 투자 정보와 기회를 얻습니다. 내가 업체를 발굴해 30억 투자할 기회를 만들어내면 '에이~ 그러지 말고 나도 10억만 투자하게 해주고 너는 20억만 해.' 이런 식입니다. 그렇게 소위 '클럽 딜(club deal)'이 만들어집니다. 혼자서 30억을 투자하는 것보다는 10억씩 세 군데서 투자하면 투자하는 입장에서도 분산 투자로 리스크를 줄이는 효과가 있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클럽 딜은 투자처 발굴의 한계에서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내가 이 투자를 확신한다면 30억을 혼자 다 투자하는게 더 좋지 않겠어요?
확신이 부족한 이유는 뭘까요? 그건 전문성 또는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투자하고자 하는 기업을 내가 속속들이 이해하고 있다면 그 회사가 성공할지 실패할지 판단은 쉬운 문제가 됩니다. 그런 회사에 투자해서 실패하더라도 그건 불가항력적인 이유일 경우가 높기 때문에 투자한 회사가 망했다고 해서 투자자가 지탄받을 일은 적겠죠. 그러나 그렇지 못한 이유는 투자를 하는 벤처캐피탈리스트의 전문성이 사실은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실리콘밸리를 포함한 전세계의 성공적인 벤처캐피탈리스트들은 사실 대부분 베테랑들입니다. 관련 산업에 거의 평생 종사했거나 직접 사업을 하고 엑싯을 한 당사자이거나 산업/기업 전문기자로 오래 종사하면서 업계와 인물에 대한 정보를 훤하게 파악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죠.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한민국 벤처캐피탈리스트 중에 전문가는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이 만나는 대부분의 벤처캐피탈리스트는 MBA출신이거나 대기업, 회계법인에 몇 년 종사한 경력이 전부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나는 이 업을 평생 혹은 목숨걸고 하고 있는데 이 업을 제대로 모르거나 겨우 몇 년의 수박겉핡기식 경력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 단편적인 지식 혹은 선입견을 가지고 '그래서 사업이 되겠어요?''내가 볼 때 당신 망할 것 같다' 이렇게 단정지어 버리는 형국이라니요.
대한민국 벤처캐피탈에는 전문가가 부족합니다.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에서 사업 하나를 기획해서 완성까지 시켜본 능력자는 아예 없다시피 하고 직접 창업을 해봤거나 엑싯을 했거나 망해본 사람 역시 채 열 명도 안 됩니다. 그러니 어떻게 벤처 투자를 제대로 할 수 있겠어요. 그나마 10년 이상 벤처캐피탈 업계에 종사하면서 산전수전 다 겪어본 분들이 대한민국 벤처캐피탈 업계를 끌어가고 있다는 것이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 면에서 창업과 엑싯을 경험한 분들이 엑셀러레이터와 스타트업 투자자로 활동하는 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그 분들이 대한민국 스타트업 생태계를 업그레이드하는 장본인들이죠.
내용이 너무 길어진 관계로 결론을 정리해보면,
1. 대한민국 벤처캐피탈은 맨날 돈 구하러 다녀야한다는 측면에서 스타트업과 다를 게 없다.
2. 대한민국 벤처캐피탈은 게으르다.
3. 대한민국 벤처캐피탈에는 전문가가 부족하다.
창업을 하고 엑싯을 했거나 망한 경험을 통해 통찰력을 길렀거나 산업/기업 전문 기자로 오래 활동한 분들이라면 인큐베이터, 엑셀러레이터, 벤처캐피탈리스트에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전세계적으로 볼 때 대한민국 스타트업 생태계가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니지만 스타트업들이 가진 역량을 더 키워줄 수 있으려면 이런 전문가들이 지금보다 열 배는 많아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