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 '클로즈드'... 울고 싶은 연말. 크리스마스가 지난 후 언론에서는 크리스마스 시즌 같지 않았던 침울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전했습니다. 그만큼 경기가 어렵습니다. 안 그래도 어려운 경기에 역사상 최악의 AI는 전국을 휩쓸고 있는데 나라의 경제와 민생을 챙겨야 할 분들은 거짓말하기 바쁘고 대한민국을 구원할 용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2016년 가장 유행한 단어가 있다면 '각자도생(各自圖生)'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도 나를 살게 해주지 않으니 스스로 살 길을 찾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스타트업 박싱데이는 정말 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연말에 스타트업이 가진 재고를 조금이라도 현금화하자는 취지도 좋고 마케팅과 홍보가 제한적인 스타트업 제품을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된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스타트업에게 응원이 필요한 시기에 열린 행사이기 때문입니다.
박싱데이 아이디어를 처음 생각한 건 올해 초였습니다. 대학 시절, 은사님을 만나러 2학기 기말고사를 마치고 무작정 캐나다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었던 덕에 그 곳에서 한국과 완전히 다른 두 가지 문화를 경험했습니다. 12월 24일 오후부터 가게들이 다 문을 닫아서 물건을 사거나 외식을 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과 박싱데이를 누리기 위해 12월 26일 새벽부터 대형 마트 앞에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알게된 박싱데이는 제품을 기존 판매가의 10% 수준으로 할인 판매하다 보니 필요한 물건을 사려고 박싱데이까지 1년을 기다렸다가 물건을 사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기업은 연말에 남은 재고를 정리하고 소비자는 매우 합리적인 가격에 제품을 살 수 있는 기회이니 호응이 좋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아이디어를 스타트업에 접목해야겠다는 생각이 바로 올해 든 겁니다. 연초부터 스밥 운영진을 포함하여 스타트업 업계 종사자들과 얘기 나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이디어를 던져봤는데 모두 반응이 좋았습니다.
거쳐야 할 과정은 많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야 하기 때문에 장소를 확보해야 했습니다. 연말에 많은 사람들이 모일 장소를 제 능력으로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서울시에 조심스레 의사타진을 했습니다. 마침 창업 생태계 지원에 적극적이었던 서울시가 행사의 취지와 스밥이라는 커뮤니티를 높게 평가해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라는 좋은 공간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예산도 문제였습니다. 무료 행사라 예산은 거의 대부분 스폰서에 의지해야 하는데 경기도 어렵고 시간도 촉박해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것 역시 서울시와 서울산업진흥원 도움이 컸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번 박싱데이는 적자가 많이 났습니다. 고맙게도 몇 몇 분들이 선의의 고통 분담(?)을 해주셔서 적자를 매꿨습니다. 그 분들 복 받으실 겁니다^^
가장 중요한 건 운영진 구성이었습니다. 스밥 운영진 구성뿐만 아니라 스밥에서 하는 모든 행사는 발런티어들로 운영진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행사의 성공보다 더 중요한 우선순위는 스타트업 피플들에게 훈련의 기회와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르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기획하고 팀웍을 만들고 성과를 내는 훈련은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값진 기회입니다. 기획과 운영 모든 것을 발런티어로 구성된 운영진이 책임집니다. 저는 킥오프 미팅에서 리더를 세우고 팀을 구분하는 역할까지만 하고 그 이후는 심지어 준비 모임에 참여하지도 않기 때문에 당일 어떤 프로그램이 있고 어떻게 운영되는지도 모를 때가 있습니다. 말이 안 될 것 같지만 '헤이, 스타트업1000' '헤이, 스타트업 3000' '스타트업 박싱데이'가 모두 그런 방식으로 진행됐고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이것이 스타트업의 힘입니다. 이번 박싱데이 운영진은 약 20명으로 구성됐고 역대 어느 팀보다 높은 팀웍을 보여줬습니다. 심지어 박싱데이가 끝나고 2주가 지난 지금까지도 단톡방에 하루에 글이 200개씩 올라옵니다ㅋ. 박싱데이를 하기 전까지는 대부분 모르는 사이였던 사람들이 약 한 달 동안의 집중적인 준비 과정과 하루 행사를 치르면서 단단한 팀웍과 동지애로 뭉쳐진 것입니다. 아름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홍보에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국이 시국인데다 경기도 어려워서 사람들이 모이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솔직히 걱정이 안 된 건 아닙니다. 지금까지 홍보는 스밥 페북 페이지와 플래텀을 포함한 스타트업 미디어의 지원에만 의지해 왔는데 스타트업 섹터를 넘어 일반인들에게도 홍보가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스밥 게스트로 한 번 만났을 뿐인 대스타 '카만녀'님이 시키지도 않은(?) 컨텐츠를 만들어서 페북에 포스팅하면서 바이럴을 넓혀 주었습니다. 저도 몰랐던 19세기 중반 영국 빅토리아 여왕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박싱데이의 기원까지 찾아서 정성이 뚝뚝 묻어나는 스토리텔링으로 저를 완전히 감동시켰습니다.
서울시도 홍보에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서울시 덕분에 신문에도 기사가 많이 나갔고 옥외전광판 광고도 진행됐습니다. 그 결과 당일 오셨던 분들은 보셨겠지만 스타트업 피플들 못지 않게 일반 시민들도 많이 참여해주셨습니다. 아이들 손을 잡고 오신 가족들부터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까지. 스타트업 제품과 문화를 일반인들에게도 확산시키자는 행사의 취지가 성취된 순간이었습니다. 2017년 스타트업 박싱데이는 이미 날짜와 장소가 확정되었습니다. 서울시는 내년도 함께 합니다. 당일 행사에 오셨던 서울시 관계자들도 신이 나셔서 먼저 적극적으로 추진해 주고 계십니다.
개인적으로 박싱데이에서 가장 좋았던 순간은 부스로 참여한 스타트업이 다른 부스를 서로 찾아다니며 인사하고 명함을 주고 받으며 네트워킹을 하고 제품을 구매해주고 협업을 얘기하며 함께 웃고 공감하던 장면들이었습니다. 남성용 패션 소품을 하는 바이수미 부스에 스트라입스도, 왓슈도 찾아가서 함께 얘기하고 웃던 진지하고 진실한 사람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그 장면이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저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주렁주렁 부스도 좋았습니다. 추운 겨울인데다 동물을 외부로 데리고 나오기 어려워서 대표님이 양해를 구했는데 직원들이 오히려 적극적으로 가겠다고 했던 스토리며, 매일 테마파크에만 있던 직원들이 박싱데이에 와서 에너지를 많이 얻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한 번도 이런 형태로 회사 홍보를 해본 적이 없었는데 왜 안 했는지 모르겠다며 앞으로는 적극적으로 이런 행사에 참여해야겠다는 이야기들. 스밥 게스트로 참여한 적 있었던 윙잇(WingEat) 부스는 떡볶이 시식회를 하면서 회사 매출이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을 때의 기쁨.
무엇보다 부스들을 돌면서 '많이 파셨어요?'라고 물으면 많은 부스들이 '네!'라고 답할 때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2016년 박싱데이는 100개 이상의 스타트업이 참가 신청을 했지만 공간의 한계로 60여 업체 밖에 기회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제가 몰랐던 한 가지는 스타트업이 자기 제품과 브랜드를 알리고 네트워킹할 기회가 의외로 없다는 것과 스타트업이 네트워킹하기 제일 좋은 방법은 부스를 운영하고 제품을 판매하는 거라는 것이었습니다. 바쁘고 귀한 시간을 쪼개가면 운영진으로 활약해주신 멋남멋녀들, 박싱데이이 참여해주시고 지원해주신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2017년 박싱데이는 올해의 10배 규모로 진행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