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이나 창업을 준비하고 있는 분들을 만나는 건 제 일상입니다. 만나서 특별한 걸 하는 건 아니고 그냥 얘기 들어주고 제가 아는 건 알려주고 생각나는 아이디어가 있으면 이야기해주고 밥 사주고 커피 사주는 게 전부인데 이런 분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참 다양한 스토리들이 있습니다.
지난 해 봄, 제가 아끼는 모 기업의 대표가 스타트업 대표 J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외국계 컨설팅 회사에서 일하다가 창업을 한 친구였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일단 당장 돈이 안 되는 비즈니스를 하고 있었습니다. 시장 자체가 형성돼 있지도 않은 분야였을 뿐더러 J가 펼치고 있는 사업모델로는 먹고 살기가 힘들어 보였습니다. 제가 해준 얘기는 '시장 자체가 너무 작고 사업모델도 약하니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게 좋겠다. 피봇팅을 하든지 아니면 다른 생각하지 말고 이 분야를 다 먹어라' 였습니다. 능력이 없어 보이는 친구는 아닌데 분야를 잘못 잡은 탓인지 역량을 펼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만남은 밥 한끼 먹으면서 이런 얘기를 해주는 것으로 끝이 났고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몇 달 후, J에게 만나고 싶다고 연락이 왔고 8월의 마지막 날 을지로에서 J를 만났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보여줬던 자신감과 달리 몇 달 만에 다시 만난 J는 돈도 마음도 여유가 없어 보였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사이 상황은 제 예상대로 흘러갔습니다. J는 오늘이 청년창업대출 상환일인데 방법이 없어서 그냥 연체를 시키기로 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아마 착잡한 심정에 하소연할 곳이 없어 저를 찾았던 것 같습니다. 저도 배고프고 의지할 데 없는 창업자의 길을 걸어봤기 때문에 그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평소에 그런 일이 잘 없는데 이 날따라 마음이 동해서 오늘 상환해야 할 금액이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금액은 3백만원. 저는 내가 그 돈을 빌려줄 테니 연체는 시키지 마라, 연체가 되면 신용에 문제가 생기고 사업하는 사람이 신용에 문제가 생기면 다시 기회를 만들기 어려워진다, 이번 달은 이렇게 시간을 벌고 다음 달부터 해결할 방법은 스스로 찾으라, 내가 빌려준 돈은 나중에 돈 생기면 갚아라, 이런 얘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기대하지 못했던 상황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몰라하는 J의 표정이 보였습니다. 일정에 쫓기던 저는 미팅을 빨리 마치고 자리를 떴고 그 날 오후 송금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설 명절을 며칠 앞두고 J에게 문자가 왔습니다. "저 작년에 대표님께 진 빚 갚아야 해요. 돈 갚게 해주세요." 그렇게 또 몇 달 만에 J를 만났습니다. 사실 그 때 빌려준 돈은 돌려받을 생각을 하고 빌려준 돈이 아니었습니다. 못 받는다 생각하고 J가 포기하지 않게 하기 위해 빌려준 돈이었습니다. 다시 만난 J는 얼굴이 밝아보였고 눈에서는 빛이 났습니다. 그 사이 J에게는 많은 변화들이 있었습니다. 지난 연말 모 엔젤 클럽으로부터 5천만원 가량의 투자를 받았고 새로 런칭한 사업모델에서는 의미있는 반응과 함께 아직 많지는 않아도 희망적인 매출이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새로 런칭한 사업모델은 기존의 사업모델과도 시너지가 있었고 소위 금융쟁이들이 말하는 돈 냄새가 났습니다. J는 길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J는 지난 8월 말 내가 돈을 빌려준 것이 정말 큰 힘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가 최악이었는데 그 덕에 다시 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말이죠. 이야기를 들으면서 말하는 J보다 제가 더 신이 났습니다. 사실 몇 백만원의 돈이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돈인데 그 돈이 한 명의 청년 창업자에게 최악의 상태에서 희망을 주고 반전의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니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벽에 부딪혔을 때 포기해야 할 때가 있고 포기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버틴 것이 결과적으로 집착이었을 때가 있고 포기해 버린 것이 오판일 때도 있습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선택하는 것이고 선택의 결과는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포기할 상황에서 도움을 주는 것이 좋을 때가 있고 역으로 마이너스가 될 때도 있습니다.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순간에 저의 미약한 도움이 J에게는 징검다리 돌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스스로의 노력과 주위의 도움으로 그 뒤로 징검다리 돌 몇 개가 더 놓아졌습니다. 이후에 돌들이 몇 개나, 얼마나 더 많이 놓여질지는 알 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지도 역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이 J에게는 기회가 되었고 새로운 도약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혹시나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주변에도 J와 같은 상황에 놓인 창업자들이 있다면 손해 볼 생각을 하고 한 번은 도움을 주시기 바랍니다. 또 아나요. 그 한 번의 도움이 세상을 바꿔놓은 위대한 기업가의 스토리에 등장하는 날이 올 지. 빌려준 돈을 상환하면서 J는 통장에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문구를 써 보냈습니다. 또 몇 달이 지나서 J를 만나게 되면 사업이 지금보다 훨씬 더 커졌다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