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길(오미-송정마을)과 화기운 없는 황토방 할머니
문수저수지 앞에서의 하룻밤이 지나갔다. 공지영 책 말처럼 손상되지 않은 새 아침이 왔다. 게스트 하우스 부부께서 다음 둘레길 초입까지 산책 겸 같이 걷자 했다. 타지에 살다 구례에 정착한 지 13년 되었다는 부부는 세계 오지마을을 다니셨다 한다. 내년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싶어 여행 팁을 물어봤다. 여행 가기 전 얻는 정보에 너무 의지하지 말라 했다. 모든 것이 계속 바뀌고, 최신 정보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얻을 수 있다고. 내가 가진 편견을 깨러 가는 여행이니, 내 생각을 너무 고집하지 말라 하셨다. 인도나 네팔 등 오지를 다니셨던 분이신지라 배울 점이 많았다.
어느 정도 걷자 평상이 나왔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장께서 직접 설치하신 거란다. 여기까지 어떻게 가져왔냐 했더니 차로 가져왔다고. 둘레길에 시멘트가 깔려 있어 아쉽지 않으시냐면서, 여기 사람들 농사지으러 차 올라오게 하려고 깔은 거라고 소개해주셨다. 도시에서 온터라 이 정도는 괜찮다고 했다.
주인장 부부와 헤어진 후 걸은 코스는 시멘트길이 사라졌다. 진짜 깊은 숲으로 들어갔다. 오미 재라는 고개를 넘는다. 편백나무가 하늘 높이 싱싱하게 솟아 있다. 둘레길 지도를 보니, 산불이 난 흔적이 있다고 하는데, 나무 밑둥이들이 그을린 게 있었다. 나무 끝을 보니 초록이 자라고 있었다. 엄마에게 배운 것, 식물은 끝에 성장점이 있어 끝 부분이 살아 있는지 확인하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있다 했다. 산불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나무들이 기특했다.
고개 꼭대기에 벤치가 있었다. 여기에서 컵라면에 물을 부어 먹었다. 이렇게 꿀맛일 수가 없다. 자연과 함께 하면 적게 가져도 만족도가 높아진다. 우리가 도시에서 결핍이나 수치심을 느끼는 건 자연과 멀어서 그런 것 같다.
고개를 내려오자, 송정마을이 드러났다. 다음 숙소는 지리산 둘레길 홈페이지에 있는 황토방이었다. 지도 앱에 사진 하나 찾을 수 없었다. 전화로 예약하니, 숙박비는 와서 주라고 하셨다. 1박에 5만원이고 식사는 8천원. 할머니 목소리라 현금을 준비했다. 도착해서 보니, 오래된 황토방이었다. 안에 들어가니 조명은 침침하고 전등갓에 거미줄이 쳐 있었다.
씻고, 그 마을 아래 섬진강변에 숙소에 갔다. 섬진강이 도도히 흐르고 있는걸 멍하니 봤다. 뭘 더 생각할 필요 있는가? 나는 여기 쉬로 왔는데.
해가 일찍 지고 있어 숙소로 복귀했다. 할머니께서 저녁을 해놨다고 부르셨다. 된장국 냄새가 좋아서 보니, 갓담은 김치에 볶은 어묵에 깻잎 장아찌에 다 맛있었다. 할머니랑 대화를 나눠보니 서울에 월세를 받는 건물도 있는데, 할아버지가 여기 땅을 사서 내려오셨단다. 서울 집은 밤에 잘 때 차 소리가 나서 시끄러운데, 여기는 조용하단다. 할머니 아들 이야기까지 나온다. 겉모습은 그냥 시골 할머니신데, 동경대학교까지 아들을 유학시키셨단다. 막내아들이 40이 넘었는데, 아직 장가를 못 갔다고 한다. 같이 간 일행과 나는 사주를 공부하는 사람이라 아들 사주를 봐드렸다. 몇 년 후 결혼운이 들어오니 걱정 말라했다. 할머니가 당신 사주도 봐달라길래 열어봤다. 괴강 무술 일주. 목 관성이 많아 관성이 뜻하는 할아버지를 따라오셨구나. 그런데, 사주에 화 기운이 없다. 전라도 집들은 국화꽃을 심거나 감나무를 심거나 아기자기 예쁜 게 있는데, 할머니 집엔 그런 게 없었다. 보이는 것을 뜻하는 화기운이 없으니 황토방 내 전기등 거미줄도 그대로구나.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독립심 강하고 똑똑한 사주라고 설명드렸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아들들도 똑똑해.
일행과 방으로 돌아와 할머니 사주 이야기를 했다. 화기운이 없으시잖아. 보이시는 부분에 신경 안 쓰는 이유가 있어. 그러니 이해되지. 다시 검은 벨벳의 밤에 우리는 어둠 속에서 할머니를 이해하며 잠이 들었다. 만물을 품는 지리산처럼 너른 마음이 되어가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