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다가 수많은 문제를 만난다. 문제가 발생할 때, 습관적으로 자책을 하는 버릇이 있었다. 이 자책은 반성과 개선으로 이어지면 좋겠지만, 순간 에너지를 떨어뜨리기도 한다. 젊었을 땐 자책해서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하며 개선되기도 했지만, 나이 든 요새는 그럴 에너지가 나기 힘들다.
외로움 수업 책에서 실수가 자책이 되지 말고 반성과 성장의 도구가 되게 하라는 글을 읽었다. 반성과 성장의 도구로 쓰여야 할 실수인데, 자꾸 자책으로 빠지는 이유가 뭘까?
지난 주말, 비폭력대화 수업을 참여하다 여자분들이 일상에서 사건사고를 만날 때 자책으로 잘 빠지는 패턴을 보게 되었다. 내가 보기엔 굳이 자책까지 갈 필요가 없는 일에도 습관처럼 말이다. 이 부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한편으론 왜 남자들은 자책의 감정을 가지는 걸 별로 본 적이 없다. 왜 그럴까?
대한민국 여자로서 보살핌이나 배려 등 사회적으로 암묵적으로 요구받는 역할이 있다. 그걸 천성적으로 잘하는 여자들도 있지만, 성격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일부러 악의적으로 그러는 게 아닌데, 이타적인 여자들은 왠지 칭찬을 많이 받고, 그렇지 않으면 엄마들에겐 네가 바른 엄마냐의 질타 등이 날아온다. 최근 모성애도 사회적으로 강요된 게 아니냐는 글을 읽었다. 아무리 여자라도 타고나길 전통적으로 강요받는 엄마의 모델을 못할 수도 있는데, 내 생각엔 우리 사회가 그 다양성을 허용하지 않고 비난으로 점철된 문화가 있는 것 같다. 나 또한 자책을 자주 하는 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비난을 많이 했던 아버지가 엄마에게 쏟았던 질책에서 그 감정이 나온 것도 같고. 난 엄마는 아니었지만, 어릴 때 엄마에게 감정이입을 많이 했었다. 그런 감정과 습관이 남아 있는 것 같다.
강신주의 감정수업에서 보면 후회라는 감정에 대해 어떤 문제를 너무 자신의 입장에서만 본 것이라고 설명한다. 어떤 문제가 일어난 것은 다양한 변수 때문에 그런 건데, 꼭 나 자신이 모든 책임을 100프로 가지고 있다면, 어쩌면 유아기적 좁은 시선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반복하는 자책의 감정을 너머 더 너른 시선으로 문제를 봐야 하지 않을까?
봄이다. 도시의 아파트 앞에도 산수유가 피었다. 자책 대신 마음을 활짝. 봄꽃처럼 피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