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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긍정태리 Jul 19. 2024

살아있으니 불안하고, 불안하니 그렸다

절규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 전시에 가다.

장마가 시작됐다. 굵은 비와 구름은 태양을 가려 만물이 회색빛이다. 이럴 때 우연히 <화가 뭉크는 어떻게 조현병을 극복했나>는 기사를 읽게 되었다.


https://www.abl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3795


뭉크는 뺨에 손을 대고, 창백한 공포에 질린 얼굴이 인상적인 <절규>라는 작품이 유명한 화가다. 그는 초년기에 많은 죽음을 보았다.  다섯 살 때 어머니의 죽음을,  열네 살 때 누나의 죽음을, 남동생과 아버지도 죽고, 살아남은 여동생은 정신병원에 갔다. 꿈을 키울 시절, 많은 상실을 경험한 트라우마는 뭉크의 불안을 자극한다.


화가가 되어 세명의 여자와 사귀었지만, 끝이 안 좋았다. 어떤 여자는 뭉크의 친구랑 결혼하기도 했다. 마지막에 사귄 여자는 결혼에 집착했지만, 뭉크는 본인 가족의 병력 때문에 상실이 두려워 결혼을 거부했다. 그녀는 죽어가고 있다고 소문을 내 뭉크를 만났지만, 거짓임이 드러나자 실갱이 끝에 권총이 발사되어 뭉크의 왼쪽 손가락을 잃는 사고가 난다. 결국 그녀는 다른 친구와 결혼하고, 뭉크는 장갑을 끼며 잃어버린 손가락을 감추며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한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 어두울 수 있을까? 시는 모르지만, 나무위키의 생년월일로 추정해 사주 중 삼주를 뽑아봤다.


생명력 강한 꽃이나 덩굴식물로 비유하는 을목인 뭉크는 강한 수 기운이 많다. 경쟁자인 겁재 갑목이 월간에 있다. 인성이 강해 생각이 많고 그게 차디찬 수기운이라 많은 생각의 끝은 부정적으로 흐를 수 있다. 더군다나, 수를 더하는 금수대운이 근 40대까지 흐른다. 그림을 뜻하는 일지 사화가 희신인데, 과도한 수기운으로 꺼질 판이다. 큰 물 앞에 불을 지켜야 하는 형국이니 정신적 불안에 수십 년간 시달렸을 것이다.


화를 지키기 위해 그림을 놓지 않은 그의 심정이 이해됐다. 불안, 우울, 질투, 죽음에 대한 공포는 평생 그의 그림 소재였다. 누이의 죽음을 그린 <아픈아이> 같은 작품은 반복해서 그렸다. 트라우마가 되는 감정들은 끊임없이 내면에서 올라온다. 그 감정을 거부할 수도 없으니 그는 세상에 있는 그대로 감정을 드러내는 그림으로 마음을 승화시킨다.


그럼에도 불안이 가시지 않자,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한다. 대운의 방향을 보면. 을목이 안정적으로 뿌리를 내릴 토지를 만나는 기미대운 40대에야 그는 병이 차도를 보인다.


화기운의 그림은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도 상징하지만, 드러내서 발산과 휘발되는 것도 뜻한다. 억누르지 않은 감정들은 모두 발산되고, 후반기는 점점 밝아진다. 특히, 70대 태양의 기운이 있는 병진대운이 눈에 띈다. 어두운 길을 지나 태양이 기다리고 있는 70대를 향해 그림으로 불을 밝히며 산 것 같다. 실제로 말년으로 갈수록 그의 그림은 밝아져 오슬로 대학에 걸렸다는 태양을 보면 밝고 희망찬 빛이 사방에 발산되는 형상이다.


그의 작품을 보기 위해 예술의 전당으로 향했다. 절규부터 마리아까지 온 생애를 걸쳐 그린 유명한 작품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좋았던 건 어둠의 젊은 시절이 끝나고 밝아진 초상화를 그린 것이다. 일상에 대한 그의 찬미도 좋았다.

어제가 그제 같고, 그제가 어제 같은 지난한 날들이 계속된다. 하지만, 어둠의 시기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안한 일상의 가치를 밝혀준다. 그간 나의 일상도 지루했다.. 하지만, 과거 방황을 겪었던 시대에 비하면 나의 일상은 얼마나 소중한가?


뭉크는 세기말 19-20세기 사람이다. 이때 사진기와 무성영화 나오며 이 변화 앞에 화가들이  불안해했다. 사진의 효과를 흉내 낸 그림까지 있다. 21세기 현대를 살아가는 쳇gpt와 AI 등의 등장으로 직업이 없어질 거라는 불안에 산다. 19세기의 불안을 돌아보면 그게 인생의 본질 같다. 인간은 변화 앞에 적응하려고 노력할 것이며, 그 노력 안에서 창조성이 싹틀 것이다.

깊은 심연을 거쳐 살아온 그인지라 죽음과 노화도 담담히 그림에 옮겼다. 평생 있는 그대로 본인을 드러내고 발산하며 치유해 온 그는 그림으로 모든 감정을 수용했다. 노화로 흐려진 시선을 처리한 그림도 인상 깊었다.


나도 그처럼 50대 60대 70대를 살 것이다. 삶이 주는 모든 경험을 있는 그대로 껴안으며 살아보겠다. 하찮은 일상의 가치도 잊지 않겠다. 일상의 성스러움을 알아 보겠다. 오늘 느끼는 인간 보편적인 어두운 감정의 끝은 빛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어 보겠다.


지루한 장마 끝의 무지개를 기다려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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