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생활 (벌써 8년째), 열
당신을 생각하면 내가 더 강해져야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그립거나 안쓰럽거나 슬프거나 보고 싶다는 말들은 너무 말랑말랑해서
나는 그런 기분이 들기 전에 반대로 마음을 꽉 조여 맵니다.
아이 때부터 혼자 하기를 좋아했던 나는 커서도 누구에게 쉬이 기대지 못하는 어른입니다.
당신께도 그렇습니다.
당신과 함께였던 시절은 창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처럼 반짝거립니다.
원하는 모든 일들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아침에는 음악이 흐르고 따스한 날에는 초록색 식물들이 기쁘게 반겨주었던 날들입니다.
늘 바쁘지만 늘 즐거운 이상한 당신이 드라이브처럼 떠나는 일과
그곳에서 만나는 젊고 늙은 다양한 사람들 그리고 내게 보여주고 싶어 했던 세계들.
그중에는 내가 속했으면 하는 세계도 있었겠지요.
어린 나는 당신을 보며 많이 배웠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당신의 안전한 울타리 속에서 희망과 이상만을 좇아 온 것 같습니다.
좋은 미래만 꿈꾸는 당신에게 건조한 현실을 마주하는 방법을 배울 수가 없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런 당신이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나의 무지와 내가 누리지 못한 것들이 당신의 탓이 아니라 내게 달려 있다는 것과
좋은 미래를 꿈꾸는 일이 그때의 우리에게 최선이었다는 현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당신의 말들은 내가 기로를 마주할 때에 불빛이 되고
당신이 치열하게 살아낸 삶은 내가 인생을 마주할 때에 길잡이가 되어줍니다.
당신 안에서 살았지만 당신과는 또 다른 나에게는 때로 정반대의 방향이 정답이기도 합니다.
당신을 떠올리면 그냥 웃음이 납니다.
어떤 날은 마음 잘 맞는 친구
어떤 날은 철없는 아이
어떤 날은 나
어떤 날은 산이고 어떤 날은 호수이고
어떤 날은 햇살이고 어떤 날은 바람이고
어떤 날은 보고 싶은 할머니와 할아버지 같은 당신.
나의 역사인 당신.
내 삶의 절반은 당신이 남긴 보이지 않는 흔적입니다.
스물이 넘어 지금까지 내가 스스로 해 왔다고 생각하는 삶의 선택들도
젊은 날의 당신의 선택들과 닮아 있을까요.
나는 내 아이에게 당신 같은 엄마가 되어 줄 수 없기에
엄마가 되는 일이 어려운 것도 같습니다.
당신 안에 있고
당신에게서 멀어지려 발버둥 치는 나
당신과 함께하지 못하는 날도 당신과 함께인 날도 행복한
나밖에 모르는 나
그런 나처럼 엄마도 이제는 엄마밖에 몰랐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만약에 아주 만약에
이 세상에서 한 가지 기억만 남기고 모두 잊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나는
당신과 나 우리 둘만 아는 아름다운 추억 하나를 골라 간직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