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수의 시작은 항상 화려했던 것 같다.
29살의 나는 회사에서 주목받는 "그" 주임이었다. 회사의 장은 출장 갈 때마다 통역으로 나를 찾았고 본부장도 중요한 회의에는 무조건 나를 데리고 들어가려고 했다. 부처를 직접 만나는 가장 중요한 사업들은 모두 내가 맡았다. 나를 성희롱한 그 사람은 "네가 쓴 보고서를 읽고 말고 할게 뭐가 있냐"며 항상 노룩 승인을 하곤 했다. 내 동기들은 질문이 있으면 내 자리를 찾았다. 그래서 내 자리는 항상 동기와 상사의 방문으로 북적거렸다. 지나친 칭찬과 관심 속에 내 어깨뽕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승천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거품도 그런 거품이 없었는데, 나는 내가 정말 대단한 줄 알았다.
2024년의 시작도 마찬가지였다. 시작은 화려했다.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1월 LSAT(LEET와 유사한 미국 로스쿨 입학시험) 시험에서 "제발, 이 점수만!"하고 바랐던 그 점수가 딱 나와줬다. 더 높은 점수는 바라지도 않았기 때문에 만족했고 이제 됐다며 환호성을 질렀다. Top 14은 아니더라도 가고 싶은 로스쿨에 붙을 수 있는 점수가 나온 것이다. 1월 말에 원서 접수를 마쳤다. 심지어 합격 통보도 빨랐다. 직전 연도 9월부터 원서를 받는 미국 로스쿨 특성상 꽤나 늦은 지원이었는데도 지원 2주 만에 한 학교에서 장학금과 함께 합격 통보를 받았다. 드디어 로스쿨에 가게 됐다며 새벽에 침대에서 방방 뛰며 언니한테 전화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2024년 9월 나는 한국 내 집에서 아홉수 극복기를 쓰고 있다. 계획대로라면 학교 캠퍼스에서 학교 로고가 박힌 후디를 입고 케이스 읽으며 중간고사를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데,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다.
9살이었던 초등학교 2학년 때 기계체조 전문학교로 스카우트를 당해 전학을 갔다. 일반 학교에서 철봉 타고 있는 나를 본 기계체조 감독이 엄마와 담임에게 스카우트 제안을 했고 나의 짧고 굵은 기계체조 선수 인생이 이 시작 됐다. 9살의 기계체조 인생도 시작은 화려했다. 남들 몇 달 걸려 배운다는 기술을 하루에 두세 개씩 익혔다. 새 기술을 익힌 사람은 당일 운동 후 보충체력 훈련에서 제외되었는데 나는 운동을 시작하고 처음 2년 동안 보충체력 훈련을 거의 한 적이 없다. 2년 동안 거의 매일 새 기술을 익힌 것이다. 덕분에 라커룸에서 6학년 선배들한테 어깨빵 좀 맞았지만 이미 지붕 뚫고 하이킥을 한 촉망받는 어린 선수 어깨에 큰 대미지를 주지는 못했다.
철봉에 30초도 매달려 있기 힘든 뱃살 가득한 39살의 나, 시작만 화려한 나의 아홉수 인생이 9살부터 시작된 일이라니 아홉수와 내가 질기고 긴 인연인 게 맞긴 한가보다.
항상 개끗발로 끝나는 시작만 화려한 내 인생을 바꿔보기 위해 나는 로스쿨이라는 오랜 내 꿈과 끝장을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내 인생이 개끗발 인생이었던 것은 내가 중도 포기를 해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빚을 내던지 몸을 갈아 넣던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는 로스쿨에 가겠다고 다짐했다. 중도포기하지 않겠노라고.
2024년 8월 6일, 회색 비자 거절 용지를 들고 대사관을 나와 걸으며 나는 로스쿨을 보내주기로 했다. 유예 옵션도 남아 있었고, 2025년 사이클을 생각해 볼 수도 있었지만, 나는 또 "이제 그만"이라는 옵션을 선택했다. 과연 이것이 중도 포기인가. 나는 또 포기한 것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대단한 "그" 주임에서 소문의 "그" 미친년이 되어 회사를 뛰쳐나온 것처럼. 야무지게 타이즈를 입고 이단 평행봉을 넘나드는 촉망받는 유망주에서 39세의 평범한 1인가구 세대주가 된 것처럼. 나는 한국을 떠 보지도 못하고 또 첫 끗발이 개끗발로 끝나는 그런 선택을 했다.
어쩔 수 없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