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다고는 못하겠는데...
10년 전이었던 29살에 나는 아홉수라는 단어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었다. 30이라는 관문을 앞두고 많은 일들이 꼬였고 그 이후 아홉수는 잊을 수 없는 단어가 되었다. 회사에서는 성희롱을 당했고, 성희롱을 보고했지만 가해자는 전보라는 명목하에 타 팀 팀장으로 승진을 했다(보낼 팀이 팀장이 빈 그 팀 밖에 없다는게 말이야 방구야). 가해자가 변태 같다며 전투의지를 다지던 동료들도 권력 앞에서 작아졌다. "가족 같다"라고 으쌰으쌰 같이 밤새던 팀원들도 슬슬 나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고지식하기 짝이 없는 나의 부는 "넌 항상 어디 가서 그렇게 사고를 치더라"며 성희롱 피해자인 나의 본성을 탓했다. 29살, 나는 부모의 생일 식사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고, 그 이후 10년째 그와 마주치지 않았다.
성희롱 때문은 아니지만 (혹은 나는 그게 아니라고 믿고 있지만) 나는 고민 끝에 아무 비전 없어 보이는 "평생직장"을 그만뒀다. 그놈의 평생직장이 서울에서 지방으로 이전을 했기 때문에, 아무 연고도 없던 지방에서 또 별의별 일을 다 겪었다. 당시 만나던 사람은 미성년자, 유부녀 가리지 않는 동네 유명한 바람둥이였고, 내가 어울리던 "동네" 사람들은 서로 바람을 폈고, 나는 그쪽 남편으로부터 종종 새벽에 신세한탄 전화를 받아야 했다. 어린 나를 "부원장"급으로 고용하겠다던 영어학원 원장은 사기꾼이었고 우리 선생들은 급하게 의견을 모아 노동청에 진정서를 접수했다. 이제 그쪽 지방은 쳐다도 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모든 걸 정리하고 부랴부랴 서울로 올라왔다. 욕이 절로 나왔고, 그래서 욕을 실컷 했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 30이 되었고 어느덧 정신 차리고 보니 10년이 흘렀다.
10년이 흘렀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계획하고 온 마음 다해 준비하던 일이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지 못했고, 그제야 내가 39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독한 아홉수 놈이 죽지도 않고 또 찾아온 것이다.
29살 아무 준비도 없이 아홉수와 마주했던 나는 많이 울었다. 길에서 울고, 차에서 울고, 회사에서 울었다. 작은 오피스텔 방 안에서도 울고 고속도로에서도 울고 골목길에서도 울었다. 혼자도 울고 사람들 앞에서도 울었다. 운다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에너지를 쓰는 일이었지만 29살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건 우는 것뿐이었다.
10년 전의 내가 많이 울어둔 덕분인지 다행히 39살의 나는 "와 C, 이 새끼 또 왔네" 하며 웃었다. 제대로 된 질문 하나 하지 않고 "Sorry, my answer is the same as last time"라며 미국 이민법 214(b)에 따른 비자 거절 종이를 내밀던 대머리 영사는 평생 잊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나는 웃었다. 미국 대사관 옆 교보문고 뒷골목을 걸으며 나이라는 건 괜히 먹는 게 아니구나, 연륜이라는 말을 이런데 쓰는구나, 나이 먹어 생긴 연륜에 감사하며 웃었다.
안녕! 아홉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