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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혜인 Jun 01. 2018

피하지 말았어야 했다

피하지 않을 때 피할 수 있는,


몸이 좋지 않았다. 한 달 전부터 지속된 감기는 더 심해졌다. 단순한 감기가 아닌 것 같았다. 출근하려면 지금 집을 나서야 했다. 또 구역질이 났다. 속을 다 게워낼 만큼 심하게.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엄마였다. “잘 지내니?” 엄마 목소리를 듣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한 번 더 기침을 했다. 몇 달간 누적된 피로가 한꺼번에 나를 덮쳤다.


기관지염. 꽤 심각하다고 했다. 더 나빠지면 폐렴까지 갈 수 있다. 기관지염이 심해져서 하루 쉬어야 할 것 같다고, 팀장에게 문자를 보냈다. 제작비 정산 마감일이 코앞이었지만, 오늘은 쉬어야 했다. 병원을 나서며 바라본 하늘은 무척 파랬다. 하늘을 얼마 만에 제대로 보는 건지. 너무 바빴다. 제작사 일이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다. 주말도 없이 매일 일해야 했다. 잠은 하루에 2시간밖에 자지 못했다. 그렇게 드라마 한 편이 겨우 끝났다. 문제는 앞으로 만들어야 할 드라마가 네  더 있다는 거였다.


“어디냐? 왜 아직 출근 안 했냐?”




김 PD였다. 같은 직급이었다. 하지만 그는 일을 나보다 10년 전에 시작했다는 이유로 상사처럼 굴었다. 내게 몰인정하게 쏘아붙이는 그에게, 아파서, 팀장에게 말하고 하루 쉬기로 했다고 했다. “너 지금 꾀병 부리는 거지? 거짓말이면 죽는다.” 뭐라고 변명할 새도 없이 그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졸지에 거짓말쟁이가 되었다. 성실한 게 죄였다. 정직한 게 죄였다. 요령을 피우지 못해서 탈이 났으니. 김 PD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야, 팀장이 너 쉬라고 한 적 없다는데?”     


너무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


퇴근까지 2시간도 채 안 남은 시각이었다. 울컥했다. 하루만이라도 쉬면 조금 나아질 것 같은데 왜 그걸 못 봐주는 걸까. 지금이라도 회사 가겠다고 했다. 김 PD는 자기 할 말만 잔뜩 내뱉고는 또 전화를 끊어버렸다. 실망했다고, 회사 오지 말라고, 나를 보지 않겠다고 했다. 아니, 정확히 나를 보기 싫다고 했다.




감싸주지 않는 팀장이 원망스러웠다. 김 PD에게는 화가 났다. 급한 건 알겠다. 빨리 정산이 끝나야 차기작 제작에 집중할 테니. 나는 우리가 꽤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했다. 둘이서 밥을 먹은 적도 몇 번 있었다. 꼴불견이긴 했지만, 그래도 동료 중 가장 사적인 얘기를 많이 한 사이였다. 그런 그가 나를 의심하고 있었다. 열정을 모두 들이부어야 겨우 문을 열어주는 이 세계는, 문을 열고 들어온 이들에게 더한 열정을 강요했다. 강요된 양의 열정을 토해내지 못하면 세계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튕겨져 나가는 건 지는 거나 다름없다는 암묵적인 말이 나돌았다. 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요령은 중요했다. 내가 요령을 부리기 위해서, 누군가는 내 일을 맡아야 했다. 순진하고 성실한 사람일수록 타깃이 되기 쉬웠다. 내 일을 대신할 사람을 찾는 데 의심만큼 좋은 무기는 없었다.


너무 많은 일이 떠밀려 왔다. 누구도 혼자 감당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잠을 자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정신도, 몸도, 조금씩 병들어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쉼 없이 성실하게, 요령 없이 정직하게 일하면, 어느 순간 남의 일까지 대신하고 있었다. 그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어느 순간 나타나서 계속 나를 괴롭혔다. 세계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는 패배감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조직은 다 그럴 것만 같았다. 성실이 죄고, 정직이 죄가 되는 곳. 내 진짜 죄는 다른 데 있었다. 갈등이 싫었다. 못 하겠다는 말을 하면 괜한 갈등이 생길 것 같아 그 말을 미처 하지 못했다. 결국, 퇴사를 했다. 더 큰 갈등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작은 갈등은 피하지 말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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